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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식당 착한 이야기]경기 군포 인도음식점 ‘긴자’

입력 | 2013-07-27 03:00:00

향신료 고향서 직접 사와…향기 잃을까봐 그때그때 갈죠




경기 군포시 산본동에서 착한 커리 식당 ‘긴자’를 꾸려가는 파키스탄 출신 이자스 아메드 씨(왼쪽)와 그의 딸 휘자. 가게에는 향기로운 기운이 감돈다. 재료의 맛을 한껏 살린 난과 쇠고기 커리, 달 마카니(인도 콩 요리)가 먹음직스럽다. 군포=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이슬람권의 성월(聖月)이자 단식월인 라마단이 9일부터 시작됐다. 다음 달 7일까지 이어지는 라마단 동안 무슬림은 일출부터 일몰까지 일체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는다.

16일 오후 4시 반 경기 군포시 산본동 인도음식 레스토랑 ‘긴자’. 파키스탄 출신의 이자스 아메드(45)는 오전 3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다. 물 한 모금도.

그는 열기가 가득 찬 작은 주방에서 하루 종일 프라이팬을 붙들고 있다시피 했다. 라마단 때는 음식의 간조차 볼 수 없다. ‘고국에서였다면 이 시간에 식당을 열지 않았을 텐데….’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들로 인해 정해진 기도시간을 지키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다. 금식 규율까지 깰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 맛을 볼 수 없는 그가 만든 치킨 마살라 커리가 나왔다. 오묘하고 기품 있는 향기. 갈릭 난 한 조각에 커리를 적셔 입에 넣었더니 생기 넘치는 여러 향기가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며 일제히 합창했다. 움츠린 향기가 아니라 기지개를 쭉쭉 펴듯 존재를 뽐내는 그런 향기였다. 열 개 남짓한 테이블에선 늦은 점심 혹은 이른 저녁을 먹으려는 이들이 향기의 향연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메드의 고향은 파키스탄 남부 항구도시 카라치다. 그는 파키스탄에서 기계로 자수 놓는 일을 했다. 다르륵 다르륵 기계소리와 함께 청춘이 사라져갔다. 1997년 20대 후반에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식당을 차린 친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자스, 식당이 너무 바빠서 일손이 부족해. 나 좀 도와줘.”

그는 더반으로 훌쩍 떠나 그곳에서 5년을 지냈다. 아메드가 인도음식을 제대로 접한 것은 파키스탄도 인도도 아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였다. 친구의 인도음식점에서 뉴델리 출신의 주방장에게 커리와 탄두리 바비큐, 난의 재료와 배합, 조리법을 배웠다.

파키스탄과 인도는 1947년 영국 식민통치에서 분리 독립한 뒤 카슈미르 영유권을 두고 세 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이후 양국 정부의 화해 노력에도 이슬람 무장단체의 자살테러, 폭탄테러로 양국의 갈등은 여전하다. 그런 인도의 음식을 배우는 데 저항감은 없었을까. 아메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라끼리는 사이가 안 좋지만 사람들은 안 그래요. 이슬람 사람, 힌두 사람, 기도는 서로 다르지만 파키스탄이나 인도나 보통 사람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돈 벌고 아기 보고 똑같이 살아요. 음식도 비슷해요.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과 인도음식이 큰 차이가 없었어요. 음식 만들기, 재밌었어요.”

아메드는 축구를 좋아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모아둔 돈이 1000달러쯤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직접 두 눈으로 축구 경기를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더반에서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서울은 붉은 물결이 넘실대는 혈기왕성한 도시였다. 축구 구경도 신났지만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보다, 파키스탄보다 한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덥기만 한 곳보다 사계절이 있다는 한국에 끌렸다. 도시는 꿈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더반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를 고이 접어서 가방 구석에 넣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성남에서 양말에 자수 놓는 일을 찾았다. 날씨도 마음에 들었고 공장 사장도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대우하지 않았으며, 월급도 제법 괜찮았다. 어느 날, 한국에서 사귄 친구와 기분 전환 삼아 분당에 있는 인도음식점에 밥을 먹으러 갔다. 식당은 북적북적했다. ‘어,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인도음식을 좋아하나?’

커리 몇 종류와 난을 주문했는데, 모두 다 만들 수 있는 음식이었다. 그는 새삼 눈을 떴다. ‘자수 일이 아니라 식당을 해야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겠다. 그러면 파키스탄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한국에 빨리 데려올 수 있어.’ 그때부터 월급을 더 알뜰히 모으기 시작했다.

2009년 그동안 악착같이 저금한 5000만 원에다 친구에게 3000만 원을 빌려서 산본에 인도음식 레스토랑을 열었다. 아메드의 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내가 사장님이라니! 기분이 정말 좋고 행복했어요. 내가 요리사, 내가 인도 음식 잘 만드는 사람.”

식당에는 넷째 딸의 이름 ‘긴자’를 붙였다. 긴자는 꾸란에 나오는 단어로, 돈이 많이 생긴다는 뜻이라고 했다. 모든 가족이 단란하게 한집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을 담았다.

그는 한국인들의 식성을 유심히 관찰했다. 원래 인도 커리는 기름을 흥건할 정도로 많이 쓴다. 양파도 다지지 않고 그냥 쓱쓱 썰어서 넣는다. 한국 사람들은 커리가 기름지거나 건더기가 많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새우도 작은 크기부터 여자 손 절반만 한 큼직한 것까지 두루 써 봤다. 작은 새우는 커리에 잠겨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데다 손님들이 잘 먹지 않고 남겼다. 이런 식으로 식재료를 여러 조합으로 변주를 거듭하면서 어떻게 했을 때 음식을 싹 비우는지, 어떻게 만들면 남기고 가는지 꼼꼼히 기록했다. 그렇게 해서 레시피가 하나둘씩 갖춰졌다.

오전 8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식당에 나오면 그의 하루가 시작된다. 아내와 아이들은 2011년에 한국에 왔다. 닭고기 양고기 등 구입한 식재료를 씻고 자르고 정리하는 사전 준비를 한다. 양파는 하루에 80kg씩 껍질을 까고 자르고, 깐 껍질로 국물도 우려내야 한다. 커리의 기본이 되는 소스는 매일 두세 번씩 끓인다.

무엇보다 강황, 계피, 고수, 육두구, 후추, 정향 같은 향신료는 원재료를 구입해서 그때그때 갈아서 사용한다. 파키스탄에서 어머니는 그렇게 요리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도식당에서도 그랬다. 미리 재료를 분쇄해 가루 상태로 섞어서 만드는 커리는 시들어버려 향기가 사라진 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메드는 보고 배운 대로 만들었을 뿐이라고 했다. “재료를 갈아서 가루 만드는 데 오래 안 걸려요. 5분이나 10분? 미리 갈아두면 그 냄새가 다 사라져요. 그런 가루는 못 써요.”

1년에 한 번 파키스탄에 가면 커다란 가방 하나를 꽉꽉 채워서 20kg도 넘게 커리 재료를 담아온다. 이 정도면 일 년을 쓸 수 있다. 그 밖의 재료는 이태원을 돌아다니면서 시시때때로 구입한다.

아메드는 ‘생활 한국어’는 구사하지만 한국어를 읽지는 못한다. 사실 채널A라는 방송이 있는지도 몰랐다. 몇몇 사람이 수차례나 왔다 갔다 하면서 커리를 맛보고 가더니 ‘착한 카레’라면서 ‘착한 식당’이라고 했다. 3월 1일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에 소개된 뒤 그의 식당에는 손님들이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줄지어 섰다. TV 방송 전에도 동네에 소문난 맛집이었지만 착한 식당으로 선정되고 나서는 매출이 3, 4배 이상 뛰었다.

아메드의 식당은 다국적이다. 홀을 책임지는 넬리는 러시아 출신이고, 아메드의 딸 휘자도 서빙을 돕는다. 주방은 우즈베키스탄과 인도 태생의 두 사람이 지키고 있다. 손님은 밀려들고, 직원들은 한국말이 서툴러 주문을 잘못 받거나 계산서가 바뀌어 거센 항의를 받은 적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 손님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즐거운 대화를 나누면서 인도음식을 즐기는 풍경이 더없이 흐뭇하다.

그래도 그는 인터넷으로 매일 고향 소식을 찾아본다. “카라치에서는 아버지가 아침에 일하러 갈 때, 저녁에 온전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올 수 있을까 온 식구가 걱정해요. 어제도 14명이 죽었대요. 한국 생활이 좋지만 파키스탄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파요.” 그가 커리를 만들던 오른손으로 가슴을 툭툭 쳤다.

군포=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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