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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전쟁종결자냐 학살자냐… 폭격의 두 얼굴

입력 | 2013-07-27 03:00:00

美공군 기록물로 본 한국전 폭격의 실체
◇폭격/김태우 지음/488쪽·2만5000원/창비




1950년 8월 미국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B-29 중폭격기 부대가 함경남도 흥남시를 폭격하는 장면. 당시 기상이 좋지 않아 목표물 확인이 어려워 오폭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창비 제공

1940년대 초, 이 땅의 아이들에게 비행기는 ‘아이돌 스타’였다. 학교에서는 모형 글라이더를 나눠주며 꿈과 낭만을 부추겼고, 언론은 소년 비행병을 영웅으로 찬미했다.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창공을 나는 새가 된다면 얼마나 신날까. 물론 이는 일제가 가미카제(神風) 자살공격에 조선 젊은이를 끌어들이려는 프로파간다(선전선동)였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 비행기가 조국 한반도를 자욱한 포연 속에 핏빛으로 물들일 줄은. 10년도 채 되질 않아서.

정전 60주년. 올해는 유독 6·25전쟁 관련 서적이 쏟아진다. 식상한 책도 많아 옥석 가리기가 쉽지 않다. ‘폭격’은 단연 옥에 속한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인문한국)연구교수인 저자는 미국 공군의 공중폭격이란 독특한 소재를 통해 전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일단 ‘폭격’의 배를 갈라 보자. 책의 핵심은 전쟁 당시 미국의 폭격이 한반도 민초들에게 얼마나 많은 피해를 끼쳤는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데 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한국의 우방이었던 미국을 비난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저자의 목표는 더 심층적이다. 1950년대 ‘최첨단 과학기술의 총화’로 여겨졌던 비행기 전투가 실은 얼마나 허술했는지, 그리고 이를 둘러싼 역사적 메커니즘이 어떻게 인류의 생명을 덧없이 앗아갔는지를 꼼꼼히 짚어낸다.

사실 비행기는 일제강점기 소년들의 동경과 달리 애초부터 ‘마(魔)’가 낀 창조물이었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한 뒤, 강산이 한 번 바뀌기도 전인 1911년 이탈리아가 리비아 공중폭격을 감행했다. 이후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급속도로 이뤄진 비행기 발전의 역사는 전쟁과 폭격의 역사였노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6·25전쟁은 그런 의미에서 미군의 폭격 능력을 제대로 과시한 무대였다. 전쟁 발발 직후인 29일에 미 극동공군 산하 제3폭격전대가 곧장 평양비행장을 폭격한 것을 시작으로 북한 땅 요소요소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 당시 김일성은 적잖이 당황했었다. 7월 7일이면 한창 승승장구할 때인데도 미군의 예상보다 빠른 개입과 후방 폭격에 놀란 것이다. 당시 테렌티 시티코프 북한 주재 소련대사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이 그리 화를 내고 허둥대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고 보고했다.

문제는 폭격의 가공할 만한 잔인함이다. 물론 전쟁 초기 미군은 무차별 폭격을 퍼부었다는 북한 주장과 달리 군사산업시설만 타깃으로 하는 ‘정밀폭격’에 나섰다. 하지만 당시 최고로 평가받던 미 공군이었지만 레이더 수준이나 폭격의 정밀도는 지금과 비교가 안 됐다. 그러니 군 정유공장을 폭격하면 주위 민간시설이나 인가도 변을 당했다. 게다가 초기 일본에서 출격한 전투기는 비행지속능력이 떨어져 한반도에 머무는 시간이 짧아서 정확한 목표 설정이 거의 불가능했다. 마찬가지 이유로 싣고 갔던 폭탄을 모두 투하해야 회항이 가능했다. 말은 정밀폭격인데 융단폭격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북한군이 폭격 대비책으로 낮에는 참호로 피신하는 게릴라 전법을 가동하면서 미군은 어이없는 전술을 택한다. 적이 숨었을 거라 추정되는 민가나 피란민 행렬을 공격한 것이다. 물론 공산당이 위장 잠입한 사례도 적지 않다. 하지만 ‘흰옷 입은 사람들(people in white)’은 무조건 폭격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 게다가 중공군이 참전한 뒤로는 초토화 정책으로 전략이 바뀌면서 민간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원래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인 ‘폭격’은 10년 넘게 공을 들였다는 학문적 탐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역작이다. 2000년 즈음부터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와 미공군역사연구실을 통해 공개되기 시작한 6·25전쟁기 미 공군문서 10만 장을 수집, 분석했다. 특히 가공되지 않은 실제 전폭기 조종사의 하급 임무보고서를 통해 무차별 폭격이 이뤄졌음을 보여준 점이 유효했다. 학술서적답지 않게 읽는 맛도 만만치 않다.

문제는 묘하게 풍기는 이질감이다. 전체적으로 균형 감각이 탁월한 편이나 왠지 북한을 단순히 ‘피해자’로 한정하는 분위기가 기저에 깔려 있다. 분명 폭격이란 범주에서 북한은 당하는 입장이었고, 미군의 비인도적 처사는 지탄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6·25전쟁의 원흉은 북한이다. 학술적 결론만 도출하는 논문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고려한 책이라면 좀 더 포괄적이고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