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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기자 칼럼/윤상호]군(軍)과 폭탄주

입력 | 2013-06-12 03:00:00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군인은 역시 폭탄주 아니냐, 한잔씩 하자.”

2000년 9월 말 제주에서 열린 첫 남북 국방장관회담 전날 만찬장. 조성태 국방부 장관 등 남측 대표단이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등 북측 대표단에 ‘폭탄주 대결’을 제안했다. 이미 허벅술(제주의 특산주)로 1인당 30잔 가까운 술을 주고받으며 팽팽한 기싸움을 벌인 직후였다. 이에 북측 대표단은 다음 날 회담을 의식한 듯 “폭탄주는 싫습네다”라며 제의를 거절해 양측의 폭탄주 승부는 무산됐다.

맥주에 양주나 소주를 섞은 폭탄주가 군(軍) 음주문화의 상징처럼 회자된 에피소드는 이뿐만이 아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군과 폭탄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우선 한국 사회에 폭탄주를 처음 전파한 것은 군이라는 게 정설처럼 돼 있다. 포털 사이트도 1960, 70년대 미국 유학을 다녀온 군인들이 폭탄주를 최초로 들여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후 1980년대 초 정치에 입문한 군 인사들이 정치권과 법조계, 언론계 인사들과 술자리를 가지면서 ‘폭탄주 문화’가 사회 각계에 확산됐다고 한다. 당시 5공 신군부 세력이 정권 창출과 유지 차원에서 민간인들과 ‘동반자적 관계’를 맺기 위해 폭탄주를 활용했다는 분석도 곁들여진다.

실제로 몇 년 전까지 군내에선 폭탄주 문화가 대세였다. 군 수뇌부를 비롯해 일선 지휘관들이 주관하는 회식 자리에서 폭탄주가 ‘충성주’, ‘단합주’라는 이름으로 몇 순배씩 돌았다.

상명하복이 생명인 군 조직에서 상급자가 건네는 폭탄주는 개인의 주량을 떠나 거역하기 힘든 ‘주령(酒令)’이자 ‘우리는 하나’라는 일체감을 확인하게 해주는 ‘묘약’이었다. 더욱이 ‘술을 잘하면 용장(勇將), 못하면 졸장부’라는 다소 과격하면서도 너그러운 군 음주문화에 힘입어 폭탄주는 군에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군납 양주는 면세 혜택을 받아 일반 가게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데다 가짜가 없어 군내 폭탄주 확산에 일조했다는 우스개까지 회자됐다.

폭탄주는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역대 정권에서 정부 고위직과 권력기관의 수장에 오르거나 하마평에 오르는 인사들의 프로필엔 폭탄주 주량이 단골로 소개됐다. 수십 잔의 폭탄주를 들이킬 수 있는 두주불사(斗酒不辭) 능력을 가진 인사는 그만큼 호탕하고 그릇이 큰 인물로 평가됐다. 일각에선 폭탄주가 계급 고하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마시고, 회식 자리를 일찍 끝내게 만드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는 ‘폭탄주 예찬론’이 나오기도 했다.

반면 폭탄주의 폐해가 국민적 관심을 끌게 된 것도 군과 인연이 깊다. 1986년 3월 국회 국방위원회 의원들과 군 고위 장성들이 회식 자리에서 폭탄주를 주고받다 시비가 붙어 취중에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는 ‘국회 국방위 회식 사건’이 터졌다. ‘금배지’와 ‘별’ 사이에 벌어진 희대의 난투극을 촉발하게 만든 폭탄주는 그해 말 올해의 단어가 됐다.

문민정권 출범 후 폭탄주는 된서리를 맞았다. 군사문화의 잔재인 폭탄주를 근절하자는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전개됐고 군도 건전한 음주문화 정착을 내걸고 ‘폭탄주 추방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폭탄주는 지금까지 진화를 거듭하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최근엔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폭주’가 대중적 음주문화로 자리 잡는 추세다. 지난해 식품의약품안전청 조사에서 30∼50대보다 20대가 맥주에 양주나 고카페인 에너지음료를 섞은 폭탄주를 더 즐긴다는 결과가 나왔을 정도다.

폭음은 대개 사건사고로 직결되기 마련이다. 지난달 육군사관학교에서 발생한 교내 성폭행 사건의 발단도 과도한 폭탄주 회식이었다. 일각에선 육사가 사회적 추세를 반영한다는 이유로 생도의 음주 규정을 잇달아 완화한 것이 화를 자초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2001년부터 학교장과 생도대장의 승인 아래 생도들이 소량의 음주를 할 수 있게 됐고, 2003년엔 음주 승인권자가 훈육관과 지도교수, 학부모로 하향 조정됐다.

군 당국은 사건 조사 결과 교내에서 과도한 음주행위가 벌어졌지만 교수들이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생도 보호조치 등 사후 관리를 소홀히 한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아울러 육군은 생도의 음주 규정을 강화하는 등 대책 마련을 공언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군이 폭탄주와의 아름답지 못한 인연을 끊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