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굴 안 알리고 고발’ 새 앱으로 고교 1곳 700여명 실험해보니
○ 통로를 만드니 말이 쏟아져
동아일보 취재팀은 학생들의 목소리, 교실 안 풍경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기로 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은 학생들이 가장 잘 아니까, 익명을 전제로 제보하는 시스템을 갖추면 가능하다고 봤다. 정부가 1년에 두 번 하는 학교폭력 실태조사로는, 학교 곳곳에 설치한 폐쇄회로(CC)TV로는 학교폭력을 크게 낮출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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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은 2월부터 4월 초까지 155건의 ‘목소리’를 남겼다. 내용별로는 △폭력·따돌림 29건 △담배·음주·절도 37건 △일반 상담(집안문제 등) 16건 △진로 및 학업 상담 21건 △기타(건의 및 칭찬글 등) 52건이었다. 교사들은 실시간 메시지를 통해 문제를 파악하고 막았다.
지난달 말이었다. 3학년 학생 한 명이 2학년 사물함 근처에서 서성댔다. 1, 2학년이 수학여행 가고 없는 틈을 타서 축구화를 훔칠 작정이었다. 다른 3학년 학생이 복도에서 이 장면을 목격해 마스크챗으로 바로 제보했다. 문제의 학생은 그 자리에서 잡혔다. 이후에 비슷한 도난 사고는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학생은 메신저로 ‘자살 충동’을 알렸다. 교사는 “심정을 이해한다”며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면서 신뢰가 쌓였다. 사흘 정도 지났을까. 학생이 메시지를 보냈다. “만나고 싶어요.”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나눌수록 학생의 표정이 밝아졌다. 상담이 끝나고 학생이 말했다. “메신저 그리고 선생님 덕분에 덜 외로웠어요. 이젠 마음이 좀 편해졌습니다.”
처음 며칠은 장난스러운 내용이 많았다. 열흘쯤 뒤에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야자(야간자율학습) 시간에 A가 B를 때렸다. 얼굴에서 피가 흐른다”는 식의 진지한 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동생에게 미안해 참는다는 얘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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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묵하는 다수를 깨워라
정부는 국가 차원의 학교폭력 예방교육 프로그램을 지난달 마련했다. ‘키바 코울루(KiVa Koulu)’를 벤치마킹했다. 핀란드 정부가 학교 따돌림과 괴롭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 키바 코울루는 ‘침묵하는 다수’에 주목한다. 모든 학생을 방관자가 아닌 참여자로 만들면 학교폭력을 없앨 수 있다고 본다.
마스크챗 개발자 역시 이렇게 생각했다. 핀란드와 다른 점은 오프라인이 아니라 온라인, 즉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점이다.
A고 학생들은 처음에는 이 메신저를 불신했다. 고자질이라 생각했다. 도난사건과 폭력이 줄어드는 등 학교 분위기가 좋아지자 참여자가 늘기 시작했다. 가장 주목할 부분은 흡연율. 두 달 만에 거의 ‘제로’ 수준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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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바 코울루 개발에 참여한 핀란드의 사나 헤르카마 선임연구원은 본보에 보낸 e메일을 통해 익명 메신저를 이렇게 평가했다. “키바 코울루를 모바일로 확장시킨 게 놀랍다. 훌륭한 통찰이자 중요한 혁신이다.”
미국의 유명한 학교폭력 고발 다큐멘터리인 ‘불리(Bully)’를 보면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자살한 학생의 아버지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아버지는 “아들이 괴롭힘을 당할 때 옆에 있던 학생 한 명만 용기를 북돋아 줬다면 최악을 막았을 것”이라고 흐느꼈다.
한 교육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기 폭력의 57%가 교실이나 복도 등 학내에서 일어난다. 대다수 학생이 일상적으로 지내는 공간에서 학교폭력이 일어나는 셈이다. 다시 말하면 또래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학교폭력 방지에 최선책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안동현 한양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는 “10대는 자살 등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직전에 신호를 보낸다. 익명 메신저는 구원의 메신저가 되고, 방관자를 방어자로 바꾸는 힐링 메신저 역할까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