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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세 이은관 명창 “싸이式 배뱅이굿 왔구나~ 왔소이다”

입력 | 2013-04-18 03:00:00

■ 배뱅이굿 80주년 맞아 48세 제자 박정욱 씨와 공동무대




배뱅이굿의 명인 이은관 명창의 장구 소리에는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그의 제자가 꼽는 스승의 장수 비결은 끊임없는 음악 활동.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96세의 선생이 사진 촬영을 마친 뒤 한복을 벗어 개는데 48세 제자가 멀뚱히 보고만 있기에 눈짓을 했더니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유, 조금이라도 거들면 혼쭐납니다. 저 한복 끝이라도 손대면 큰일 나요.” 선생이 느릿느릿 한복을 매만지면서 다짐하듯 말했다. “당연하지. 내가 할 수 있으니까.”

1917년생인 이은관 선생(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이 배뱅이굿을 시작한 지 올해로 80주년이다. 제자 박정욱 씨가 스승을 위해 기념무대(26일 오후 7시 반 서울 충무아트홀 대극장)를 마련했다. 1시간짜리 배뱅이굿에서 앞부분 3분의 1을 선생이 하고 나머지는 박 씨가 이어받는다. 선생은 서도잡가 ‘제전(祭奠·북망산에 묻힌 임의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드리며 부르는 노래)’과 민요도 부른다. 실제 나이보다 20년은 젊어 보이는 선생은 건강에 큰 문제는 없지만 배뱅이굿 전체를 서서 부르기엔 이제 힘에 부친다.

귀가 어두운 스승이 제자에게 목소리 높여 말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배뱅이굿이 참 좋았다. 너를 통해 내 소리가 이어지듯이 이 무대에서 배뱅이굿이 부활해야 하지 않겠냐. 이 노래가 앞으로 800년은 더 불려야지.”

서울 서대문 영천시장 거리, 노래방과 술집이 다닥다닥한 5층 건물 옥상에 ‘이은관 민요교실’이 있다. 선생은 날마다 신당동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이곳으로 출근한다. 비좁고 가파른 계단을 거뜬히 올라 옥탑방 민요교실 문을 연다. 선생이 “백 살이 다 되도록 문화재로 소리를 해도 장구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빈한한 삶”이라고 칭하는 소박한 공간이다.

배뱅이굿은 굿이 아니다. 소리꾼이 장구 반주에 맞춰 배뱅이 이야기를 서도소리로 풀어내는 1인 창극이다. 최 정승의 딸 배뱅이가 상사병을 앓다 세상을 떠나자 부모가 딸의 넋을 위로하려는데 건달 청년이 거짓 무당 행세로 횡재한다는 내용. 조선시대부터 구전되다 평양 출신의 서도 명창 김관준이 1910년을 전후해 개작한 것이 선생에게 이어졌다. 80년간 배뱅이굿을 노래한 선생은 “얼굴도 모르는 배뱅이가 평생 나를 먹여 살렸으니 고맙기만 하다”고 했다.

선생은 1957년 영화 ‘배뱅이굿’에 출연하고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을 발매해 6만 장 판매 기록을 세웠다. “왔구나 왔소이다 황천 갔던 배뱅이가…”라는 시작 부분은 1960년대 인기 코미디언 남보원 씨가 흉내 내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선생은 “남보원 백남봉 씨가 우리 학원을 다녔는데 스타가 되려고 배뱅이굿을 포기한 게 아쉽다”고 했다.

배뱅이굿의 해학과 맺고 끊음을 정확히 짚으며 청중을 휘어잡는 선생은 1950, 60년대 인기 연예인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소리에 개그를 섞어 ‘국악판 개그 콘서트’를 꾸몄고, 장구를 자유자재로 돌리고 기차소리, 바람소리를 내는 개인기를 선보였다. 당시 무형문화재 심사위원들이 “소리에 재담이나 섞고 점잖지 못하다”면서 냉대해 1984년에야 뒤늦게 예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선생의 지론은 오래 묵은 배뱅이굿 그 자체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배뱅이굿 원형은 보존해야지. 하지만 관중에게 보여줄 때는 시대 상황을 반영하면서 웃음과 반전을 넣어서 대중적으로 재밌게 해. 현재와 동떨어진 옛것은 살아남지 못해.”

요즘 그는 100세 때 당당하게 펼칠 무대를 꿈꾼다. 베트남전쟁 위문 공연 때 작곡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직접 만들어온 신민요만으로 꾸미는 무대다. “문화재라고 다른 거 부르면 이래저래 말이 많은데 백 살까지 살면 떳떳하게 신민요를 부를거야.” 3만∼5만 원. 02-2232-5749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