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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얼어붙는 정국

입력 | 2013-04-18 03:00:00

장준하 “5·16은 공산주의로부터 나라 지키기 위한 혁명”




1961년 5월 16일 아침 서울시청 앞 광장에 진주한 혁명군 소속 공수부대. 전국을 일시에 장악한 군사혁명위원회가 각종 포고령을 쏟아내자 세상이 숨을 죽였다. 동아일보DB

5·16 다음 날인 1961년 5월 17일 동아일보는 ‘당면중대국면(當面重大局面)을 수습(收拾)하는 길’이란 제목으로 긴 사설을 싣는다. 5·16을 ‘쿠데타’라고 적시하면서 무엇보다 이런 사태가 일어난 배경으로 장면 정권의 무능을 질타하고 있다. 당시 민심을 반영한 것으로 보여 문장을 약간 현대식으로 바꿔 요약 인용해본다.

‘미명을 기해 난데없이 일어난 요란스러운 총성에 전 시민은 4·19를 연상할 정도로 불안과 공포에 빠졌었다. 이것이 곧 군의 ‘쿠데타’에 의한 장면 정권 타도의 신호였으니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4·19 학생혁명의 산물인 장면 정권은 집권 아홉 달을 넘도록 그 빈곤하고 우유부단한 정치역량이 이승만 시대에 못지않게 부패성을 내포(內包), 국민의 혐기(嫌忌·싫어서 꺼림)와 반발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그때그때 민의(民意)의 동향을 살피면서 지금 이 순간과 같은 초비상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를 만일의 경우를 경고해 오지 않았던가.’

사설은 이어 ‘사월혁명 그때처럼 인명의 희생자를 냈더라면 어찌 됐을까, 무엇보다도 피를 보지 않은 그것이 불행 중 다행한 일’이라고 안도하면서 ‘혁명위원회가 내건 혁명공약 중 (반공체제를 정비하고 구악을 일소하며 민생고를 해결하겠다는) 첫째 셋째 넷째 조목에 있어서는 이론(異論)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는 말로 ‘쿠데타’에 기대를 표시한다.

동아일보 사설뿐 아니라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도 초반에는 5·16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며 기대를 나타냈다. 훗날 ‘박정희의 천적’으로까지 불리며 반(反)유신 반독재를 기치로 박 정권에 강력하게 저항한 장준하(1918∼1975·언론인 겸 정치가·사상계 초대 사장)조차 사상계 1961년 6월호 권두언에 ‘5·16혁명과 민족의 진로’라는 제목의 글에서 5·16을 군사혁명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두둔했다. 잡지의 경우 매달 마감일이 발행 전달 중순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5·16 바로 며칠 뒤에 쓴 글로 보인다.

‘절정에 달한 국정의 문란, 고질화한 부패, 마비상태에 빠진 사회적 기강 등 누란의 위기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5·16 군사혁명이다. 4·19 혁명이 입헌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5·16 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이어 ‘(비록) 5·16 혁명이 우리들이 육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는 불가피한 일’이라며 혁명세력에 이렇게 주문한다. ‘단지 정치권력이 국민의 한 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넘어갔다는 데서 그친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혁명공약이 암암리에 천명하고 있듯이 집권당과 정부가 수행하지 못한 4·19 혁명의 과업을 새로운 혁명세력이 수행한다는 점에서 …5·16 혁명은 4·19 혁명의 부정(否定)이 아니라 그의 계승, 연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5·16 이후 발족한 군사혁명위원회는 장면 내각이 총사퇴한 뒤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됐다. 7월 3일 위원회 부의장을 맡았던 박정희 소장이 최고회의 의장에 올랐다.

그렇다면, 5·16에 대한 학생운동권의 생각은 어땠을까. 성균관대 학생운동권을 이끌던 김승균 전 사상계 편집장(75)의 말을 들어보면 ‘기대 반 걱정 반’이라는 당시 민심과 비슷했다. 그의 말이다.

“5월 18일 아침 ‘학림다방’에 학생운동 간부들이 모여 논쟁을 벌였는데 박정희가 군인이지만 서민의 입장을 이해할 사람이니 민주적 입장에서 정치를 잘할 것이라고 기대를 갖는 사람도 있었고 5·16은 민주화에 대한 군부의 반동이니 앞으로 운동권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예상되므로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6일 당일부터 포고령을 쏟아내면서 정국은 살얼음판처럼 얼어붙는다. 포고령에는 출국 금지, 공항 항만 폐쇄, 집회 금지, 언론 검열, 직장 이탈 금지, 통금 시간 연장, 영장 없는 구금과 극형을 규정한 조항 등이 있었다. 예금 인출 사태를 막기 위해 금융거래도 동결됐다가 1회에 10만 환, 한 달에 50만 환으로 제한됐으며 물가동결은 물론이고 매점 매석자를 극형에 처하겠다는 조항도 있었다. 구호 학술 종교단체와 기타 최고회의에서 허가하는 단체를 제외한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는 해산되고, 정치활동도 금지한다는 내용도 있었다. 서울시장을 포함해 각 시도지사, 각 도 경찰국장 등 행정 및 치안 요직들도 군인들로 채워졌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한다는 혁명공약에 따라 검거 선풍이 불어 닥쳤다. 5월 22일까지 전국에서 약 2000명이 용공분자 혐의로 붙잡혔다. 7월 3일엔 반공법이 공포됐다.

세상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사람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까지도 모두 숨을 죽인 듯했다. 검거를 피하기 위해 학생 운동가들은 학교를 떠나 순식간에 도피했다. 김지하도 서울을 떠났다.

6월 10일에는 중앙정보부법 공포와 함께 중앙정보부가 창설된다. 중정은 이후 정부 위에 군림하는 비밀정부로 군림하게 된다. ‘남산의 부장들’(김충식)에 소개된 3대 중정부장 김형욱의 증언이다.

“중정에 소속된 직업수사관들의 전직은 사찰계 형사, 방첩부대 문관, 헌병 하사관 심지어 일제치하에서 실시된 조선인 헌병과 밀정 등 형형색색이었다. 그중 어떤 사람은 일제치하 일본 순사로서 독립운동가들을 때려잡다가 한때 공산당이 서울을 점령했던 시절에는 우익 민주인사를 때려잡다가 나중에는 공산당 간첩을 때려잡은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도 있었다. 그들에게 소위 이데올로기란 하나의 겉치레에 불과했다. 그들은 어떤 이데올로기의 이름으로도 사람들을 때리고 고문할 수 있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무정부주의자였다. 누구든지 증오할 수 있고 어떤 고문 기술도 개발할 수 있으며 피의자를 학대함으로써 자신을 확인하는 (남을 학대함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사디스트들이었다.”

정치활동도 얼어붙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이듬해인 1962년 3월 16일 정치활동정화법(일명 정정법·政淨法)을 만들어 정치인 4374명의 발을 묶었다. 법안이 통과된 직후인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그의 하야가 최고회의에서 통과된 3월 24일, 박정희 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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