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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하태원]스마트폰의 리얼타임 반응

입력 | 2013-03-21 03:00:00


이명박(MB)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열리는 국무회의나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스마트폰은 적지 않은 활약을 했다. 재임 중 84개국을 방문해 역대 으뜸을 차지한 대통령답게 MB는 여러 나라에 대한 궁금증을 많이 표시했고, 관련 국무위원이나 수석이 즉답을 못하면 종종 스마트폰 검색을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MB는 회의 도중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른 게 나올 경우 ‘팩트 체크(사실 확인)’를 시켜 보고자의 간담을 서늘케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디테일에 강하고 만기친람(萬機親覽)식 국정운영을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스마트폰 3000만 대 시대의 위력은 사회 구석구석의 풍속도를 바꿔놓고 있다. 교수나 강사들에게 스마트폰은 무서운 감시자다. 특히 역사적인 사건의 발생 연도나 지명, 관련자들의 이름, 당시 직책 등 기본사항이 틀리면 곧바로 확인과 정정 요구가 들어온다. 스마트폰 현장 검색의 힘이다. 강의 전에 주요 사항을 철저하게 챙기지 않으면 망신을 당할 수 있는 것이다. 긍정적인 면도 없지 않다. 검색하면 다 나오는 내용으로 강의하면 금방 밑천이 드러나니 새로운 시각과 논리 개발에 힘써야 한다. 10년 동안 바뀌지 않는 교수님의 강의노트는 이제 옛말이 될 듯하다.

▷하지만 녹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사정이 또 달라진다. 교수나 강사의 숨결까지 잡아낼 수 있는 고성능 녹음기능은 스트레스의 원인이다. 한 사립대 교수는 “학생 머릿수만큼의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며 “조그마한 말실수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에 매일 생방송을 하는 기분”이라고 했다. 수업 중에는 스마트폰을 모두 압수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그 장면이 동영상으로 촬영돼 순식간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인터넷 세상에 도배될까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제 박시환 전 대법관이 사법연수원 강의에서 “잘나가는 로펌의 여자 변호사들은 일이 많아 시집을 못 가고, 결혼해도 가정생활을 제대로 못하고 이혼 당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해당 발언이 나오자 연수원생들은 스마트폰을 열고 단체 카카오톡 메시지로 ‘성희롱이다’ ‘기본적인 예의와 매너를 모르는 듯하다’는 의견을 주고받았고 결국 ‘박수 거부’라는 행동지침까지 확정했다. 박 전 대법관이 눈치도 못 채는 사이에 500여 명의 연수원생들이 의견일치를 본 것이다. 박 전 대법관 발언에 관해 강단 아래서 사법연수원생들이 스마트폰으로 투표를 한 것과 같다. 박 전 대법관의 발언이 부적절했다기보다는 너무 리얼해 여성 연수원생들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 같다. 아날로그 시대의 강의는 일방적인 전달이었다면 스마트폰 시대의 강의는 청중으로부터 리얼타임 평가를 받고 있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