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효 객원논설위원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북한이 지금 원하는 것은 대화다. 그것도 미국이 제의해서 북한이 마지못한 척 응하면 한국도 이에 뒤질세라 부랴부랴 나서는 그러한 대화다. 북한이 기대하는 대화의 의제는 한반도 정세 안정을 위한 대북 경제지원일 것이다.
비핵화 문제는 서로 신뢰를 좀더 쌓고 논의하자고 하면 되고, 나중에 가서는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을 완전히 종식하고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며 추가적인 조건을 달면 그만이다. 과거 20년간 익히 보아 왔던 시나리오다. 남북 간 긴장국면이 최고조에 이르러 극적으로 대화가 시작될 때마다 우리 국민은 내심 안도하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곤 했다. 북한과 대화하고 교류하는 횟수와 규모를 대북정책 성패의 잣대로 믿는 사람도 꽤 많았다.
곧 춘궁기(春窮期)가 오면 인도적인 지원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의 분위기를 마련해보려고 한다는 고위당국자의 언급이 있었다. 혹시라도 이것이 적지 않은 양의 쌀 지원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면 지금이라도 거두었으면 한다.
쌀은 북한에 전략물자이지 인도적인 품목이 아니다. 북한 당국은 모자란 쌀을 확보하게 되면 군대를 먼저 먹이고 나머지로 배급제를 강화해 지난 몇 년 사이에 크게 확대된 장마당 시장경제를 위축시키려 할 것이다. 2010년 10월 수해를 입은 북한 신의주 일대의 주민을 위해 쌀 5000t을 주었더니 나중에 주민에게서 도로 빼앗아 모두 군 부대로 옮겨놓은 것이 확인됐다. 이후부터 한미 당국은 장기간 보관이 어렵고 북한의 일반 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옥수수, 콩, 영양식품 등을 인도적인 ‘영양지원’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명박 정부가 대북 인도적 지원에 인색했던 것도 아니다. 북한 당국이 지배계층에는 도움이 안 되고 주민은 남한에 고마워할 인도적 지원품목을 꺼려했을 뿐이다. 이제 북한 주민은 시장을 통해 스스로의 생활을 챙기는 법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목적도 전략도 없이 북한과의 대화에 섣불리 뛰어드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경계해야 한다. 지금 급한 쪽은 북한이지 우리가 아니다. 작금의 북한의 행보는 민심이 불안하고 경제가 어려우니까 미국이나 한국이 빨리 나서서 대화를 제의해 달라는 메시지다. 대화와 협상은 반드시 필요한 외교 수단이다. 하지만 이를 철저히 악용하려는 북한을 상대로는 우리의 목표에 부합하는 대화가 가능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일에 우선 매진해야 한다.
먼저 북한의 어떠한 핵과 미사일 능력이라도 이를 사전에 무력화시키는 식별, 감시, 타격 능력을 구비하는 데 주안점을 둬야 한다. 작년 10월 타결된 한미 미사일지침 개정안은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환경을 구비해 줬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북한 정권이 핵 보유 의지를 굽히지 않는 한, 정치적 수사(修辭)에 그칠지 모른다. 그럼에도 북한 지도부에 역발상을 통한 새로운 윈윈(win-win)의 길을 제시하고 설득하는 일을 단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시에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의 진전을 더디고 어렵게 만드는 다각도의 처방을 강구하고 관련국들과의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 중국에 한층 책임 있는 태도를 주문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과연 한국은 그동안 얼마나 일관된 정책을 폈는지 자성해 볼 필요가 있다.
김태효 객원논설위원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thkim01@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