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살려준 미국 아버지, 그분이 날 찾다니…”
김연순 씨가 이달 초 국가보훈처 관계자들을 만나 60년 전 화상 치료를 도와준 리처드 캐드월러더 씨와의 인연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53년 당시 모습. 국가보훈처 제공
▶본보 1월 30일자 A27면 6·25 참전 미군 “화상치료 받던 12세 소녀 찾아주오”
캐드월러더 씨는 1953년 5월부터 1년간 경기 수원 미 공군 제8전투비행단에서 근무하던 중 심한 화상을 입고 어머니와 함께 부대를 찾은 한국인 소녀(당시 12세)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당시 그는 상부에 요청해 소녀를 헬기에 태워 부산의 미 육군이동외과병원(MASH)으로 보냈고, 몇 달 뒤 거의 완치된 소녀와 재회한 뒤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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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씨는 “기사를 보고 대번에 그 누님이라는 생각이 들어 친인척 등을 통해 추가로 알아보고 보훈처에 알려줬다”고 말했다. 한 씨는 “당시 미군이 지프차를 타고 화상을 입은 누님 집을 찾았는데 아주머니가 대접한 삶은 달걀을 먹고 가기도 했다”고 떠올렸다.
이를 토대로 보훈처는 캐드월러더 씨가 근무한 부대가 있던 매향리 인근 마을의 방문 조사와 주민 면담을 거쳐 김 씨를 찾아냈다. 김 씨는 “부산에서 치료를 받다 서울의 한 병원으로 옮긴 뒤 캐드월러더 씨가 매주 과자를 갖고 찾아와 그분이 오는 날만 기다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 가족은 입원비와 치료비 등을 고민하지 않았고, 캐드월러더 씨가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며 “당시 그를 ‘미국 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회고했다.
김 씨를 찾는 과정에서 캐드월러더 씨와 김 씨의 통역을 맡았던 백완기 씨(74)의 제보도 크게 기여했다고 보훈처는 설명했다. 백 씨는 “당시 김 씨의 어머니가 캐드월러더 씨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려고 큰 암탉을 부대로 가져갔는데 ‘미군은 살아 있는 닭은 먹지 않는다’고 통역을 해 돌려보내기도 했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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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처는 유엔 참전용사 초청행사의 일환으로 다음 달 캐드월러더 씨 부부를 초청해 김 씨와의 만남을 주선하기로 했다. 아울러 미국과 영국, 캐나다 등 21개 한국전쟁 참전용사협회와 함께 ‘60년 전 한국과의 인연 찾기 캠페인’을 전개할 계획이다.
윤상호 군사전문기자 ysh100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