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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예술]전쟁의 광풍에 희생된 상처받은 영혼의 울림

입력 | 2013-02-09 03:00:00

◇생존자/이창래 지음·나중길 옮김/664쪽·1만5800원·알에이치코리아




재미 소설가 이창래의 장편 ‘생존자’는 한 고아원을 중심으로 6·25전쟁의 아픔을 그려낸다. 전쟁고아가 된 주인공 ‘준’은 평생 고통과 상처 속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한다. 6·25 전쟁 당시 한 고아의 모습. 사진작가 임응식의 작품 ‘전쟁고아’

노벨문학상 심사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에게 후보 추천권이 있다’ ‘매년 초 각국에서 후보자를 추천받아 5인으로 압축한 뒤 6개월 동안 집중 심사한다’는 얘기들도 들리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이 때문에 노벨문학상을 발표하는 10월이 다가오면 각국 도박사이트들이 점친 수상 후보자군에 관심이 쏠린다. 2011년에는 눈길을 끄는 예측이 나왔다. 이 책의 저자인 재미 작가 이창래가 베팅사이트 나이스로즈에서 수상 가능성 3위(배당률 8 대 1)에 오른 것. 그해 다른 베팅사이트인 래드브록스가 고은 시인을 6위(배당률 14 대 1)에 올려놓은 것보다 높았다.

재미작가 이창래

미국에 살며 영어 소설을 쓰는 이창래는 국내에서는 낯선 작가다.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세살 때 미국으로 이민했으며, 예일대와 오리건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월가의 주식분석가로도 일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1995년 첫 소설 ‘네이티브 스피커(Native Speaker)’로 헤밍웨이재단상, 펜문학상을 받았다. 1999년 두 번째 소설 ‘제스처 라이프(A Gesture Life)’로 아니스필드-볼프 도서상, 아시아계 미국인상을 받았고, 2004년 펴낸 ‘얼로프트(Aloft)’도 호평을 받았다. 2000년에는 뉴욕타임스가 ‘미국 문단의 가장 주목받는 작가’로 선정하며 문학계의 메이저리그인 미국 시장에서 주목받는 한인 작가로 입지를 굳혔다.

무엇이 이창래에 주목하게 만드는가. 2010년 미국에서 발표된 이 작품을 읽으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6·25전쟁의 고통을 이렇게 사실적이면서도 깊고 울림 있게 전한 소설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품은 세 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흐른다. 전쟁고아인 ‘준’과 참전 미군병사인 ‘헥터’, 선교사의 아내인 ‘실비’. 이들은 6·25전쟁에서 지옥의 끝을 본다. 준은 아버지가 간첩 혐의로 사형됐고, 오빠는 전선에 끌려갔다. 피란길에 어머니와 동생들마저 잃은 준은 헥터를 만나 고아원으로 들어간다.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헥터는 아버지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자신에게 벌을 내리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다. 생과 사의 전장에서 그는 짐승처럼 변해가는 동료와 자신을 보고 폭력사건에 휘말려 불명예 제대한 뒤 고아원에서 관리인으로 일한다. 만주사변의 혼란 속에서 성폭행을 당한 실비는 선교사의 아내가 돼 고아원에서 일하지만 과거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마약에 빠진다.

소설은 거대한 전쟁의 광풍 속에서 고통 받는 개인의 삶을 조명한다. 게다가 이들의 아픔은 휴전 이후에도 이어진다. 1980년대로 시점을 옮긴 작품은 살아남은 준과 헥터의 재회를 통해, 그들의 아들 니콜라스를 찾아 헤매는 과정을 통해 전쟁이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모습을 잔잔히 짚어낸다.

6·25전쟁을 다룬 소설이 많지만 국내 작가의 경우 한국인의 아픔에 주목한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작가는 전쟁고아, 미군병사, 선교사 아내의 시선을 통해 6·25전쟁을 좀더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동시대 인류의 아픔으로 승화시킨다. 또한 지옥과도 같은 전쟁 속에 짓밟히는 인간성, 양심, 윤리들도 낱낱이 까발린다. 국가에는 전쟁의 승패가 존재하지만 한 개인에게 전쟁은 고통과 상처뿐이라는 문제의식을 묵직하게 전달한다.

책을 읽다보면 매우 사실적인 묘사에 놀라게 된다. 피란민들이 한 줌의 옥수수 가루를 두고 서로 죽이려는 장면이나 군인들이 피란민들에게 폭행과 성폭행을 일삼는 과정이 상세히 묘사된다. 전후 세대이자 미국에서 자라고 생활하는 작가가 어떻게 이런 사실적인 전쟁 작품을 썼을까 싶을 정도다. 피란열차의 지붕 위에서 떨고 있는 소녀 준의 이야기로 시작한 작품은 그가 중년 여성이 돼 죽음을 맞는 장면에서 막을 내린다. 한 여성의 기구한 삶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고, 코끝이 찡해지는 깊은 여운이 남는다.

“이미 인상적인 작품을 발표한 그의 작품 가운데 단연코 가장 야심 차고 매력적인 작품”이라는 뉴욕타임스의 평가를 비롯해 언론의 극찬을 받았다. 2011년 테이턴 문예평화상을 받았고, 그해 퓰리처상 소설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