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물질만능시대의 신사(紳士) 자격검증 보고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

《 이제 그에 대한 나의 역겨움은 모두 눈 녹듯 사라졌고, 쫓기고 상처 입고, 수갑 찬 손으로 내 손을 부여잡고 있는 그는 다만 내 은인이 되고자 했고 여러 해를 한결같이 내게 너그러운 애정과 감사를 보냈던 사람일 뿐이었다. (‘체포되어 호송되는 매그위치의 곁에 앉은 핍의 감회’ 중에서) 》

19세기 중엽 30년간 영국 문단의 황제였던 찰스 디킨스는 평생 아물지 않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 디킨스의 소설에는 애처로운 어린이가 많이 등장하고 그 세상은 겁먹은 어린이의 눈에 비친 살벌하고 기괴하고 터무니없는 곳이다. 그의 풍성한 해학은 순진무구한 어린이가 포착한 어른들의 모순, 바로 그것이다. 어린이가 편히 숨 쉴 수 있고, 타락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는 세상이 디킨스가 바라는 세상이었다. 이를 위해 디킨스는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사회악을 고발했고, 불합리한 제도의 개혁을 촉구했으며, 감동과 애수로 인간성을 개조하려 했다.

디킨스의 13편에 달하는 장편 중에서 후기 작품에 속하는 ‘위대한 유산’(1861년 출간)은 빅토리아조(朝)의 배금주의에 대한 강력한 고발장이다. 산업혁명으로 부가 팽창하면서 온갖 비신사적인 방법으로 치부한 사람들이 ‘신사’를 자처하고 ‘신사’ 대접을 받게 된 19세기 중엽 영국의 타락한 가치관을 한탄하며 맹목적인 부의 추구가 야기하는 죄와 복수의 악순환을 생생하게 제시했다.

어느 을씨년스러운 크리스마스 전날 오후에 어린 고아소년 핍이 교회묘지에서 부모, 형, 누나들의 묘비명을 처량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무시무시한 탈옥수가 나타나서 “너, 내 말을 안 들으면 네 간(肝)과 심장을 꺼내 먹겠다”고 겁을 주며 이튿날 새벽까지 묘지로 음식을 갖고 오라고 한다.

성질 사납고 인정머리 없는 누나에게 길러지는 핍은 누나에게 탄로 나서 혼쭐이 나는 것이 너무 두렵지만 험상궂은 탈옥수가 더 무서워서, 이튿날 새벽에 누나가 명절 음식으로 만들어 둔 고기 파이를 훔쳐 묘지로 간다.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죄수의 모습은 역겹고 무섭지만 한편 어린 가슴에 연민을 불러일으켜서 핍은 “맛있게 드시니 기쁘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의 인정스러운 말 한마디에 죄수는 목이 멘다.

그러나 죄수는 다시 체포돼 더 중죄인으로 오스트레일리아로 유배된다. 그 후, 핍은 친지 소개로 동네 부자 노처녀 해비셤의 집에 가서 그녀의 양녀 에스텔라와 놀게 된다. 해비셤은 결혼식 날 약혼자에게서 버림을 받고 햇빛을 완전히 차단한 집에서 10여 년간 웨딩드레스를 그대로 입고 마녀처럼 살고 있었다. 에스텔라는 핍과 동갑이지만 샛별처럼 아름답고 숙녀 같아서 핍은 처음으로 자신의 투박함과 비천함을 자각하고 열등감에 빠진다.

핍은 해비셤의 지원으로 대장장이인 매부 조의 도제가 돼 생업의 기초를 쌓는다. 하지만 핍은 늘 동경해 왔던 대장장이 일이 비천해 보여서 대장간과 고향을 벗어나 도시에 가서 멋진 신사가 되어 에스텔라에게 구혼하는 기적을 꿈꾼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느 날 런던의 재거스 변호사가 찾아와서, 누가 핍을 신사로 만들고 싶어 하니 런던에 가서 신사 수업을 받겠느냐고 묻는다.

핍은 아는 부자라고는 해비셤밖에 없고 재거스가 해비셤의 법률고문이었던지라 당연히 해비셤이 자기를 신사로 키워서 에스텔라와 맺어주려는 것으로 생각한다. 감격과 환희에 들뜬 핍은 자기를 어버이처럼 길러주고 감싸주었던 선량한 매부를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난다. 하지만 런던에 가서 교양 교육을 받으면서 인격 도야에는 별 관심이 없고 유한계급의 청소년들과 소비, 향락적인 생활을 하며 겉멋만 쌓는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성년이 된 후에는 연 500파운드의 생활비를 받는 예비 신사가 되는데, 어느 폭풍우가 심하게 치는 밤에 핍은 한 험악해 보이는 사내의 방문을 받는다. 10여 년간 핍의 악몽에 가끔 나타났던 탈옥수였다. 그 탈옥수와의 잠깐의 인연을 마치 자기 생의 오점처럼 끔찍하게 여기는 핍은 그의 출현에 경악하며 얼른 몇 푼 주어서 보내려 하지만 탈옥수는 자기가 핍의 은인임을 밝힌다.

탈옥수 매그위치는 유배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양을 쳐서 번 작은 돈을 투자하고 투기를 해서 엄청난 재산을 모았던 것이다. 그 돈으로 그는 핍에게 보은할 겸, 자기가 어떤 신사에게 속아 범죄에 이용당함으로써 흉악범이 된 원한을 자신도 신사를 소유함으로써 보상받고자 했던 것이다. 핍은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감을 느끼며 흉악범의 후견을 받아 온 것을 에스텔라나 친구들이 안다면 자기를 어찌 생각할지를 상상하고 치를 떤다.

그러나 중죄인은 유배지를 탈출해서 본국으로 돌아오면 반드시 사형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핍은 우선 그를 해외로 도피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믿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매일 템스 강에서 보트놀이를 하는 척하면서 적당한 날 그를 보트에 태워 해외로 도피시키려 한다.

그러는 동안에 핍은 매그위치의 살아온 내력을 알게 되고 그에게 뜨거운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탈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매그위치는 다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그의 재산은 국고에 몰수돼, 핍은 물질적으로 신사가 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재산을 잃으면서 인간에 대해 연민을 갖게 되고 옳은 인간의 도리와 처신을 자각하게 돼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신사가 된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이 작품에는 원숙한 디킨스의 작가적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다. 교회묘지에서 어린 핍이 탈옥수와 대면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핍이 천국 같은 곳으로 상상하며 도착한 런던의 지저분하고 음험한 분위기, 음산한 늪지, 도시의 뒷골목 등 모든 장면 묘사에 박진감이 넘친다. 그리고 겉은 거칠지만 속은 그지없이 연약한 매그위치, 살아 있는 유령 해비셤, 너무나 촌스럽지만 그 무한한 선량함과 순박함으로 고결하기까지 한 대장장이 조 등 잊을 수 없는 인물들이 살아 숨 쉰다. 원제 ‘Great Expectations’는 ‘위대한 (유산의) 기대’, ‘대단한 (장래의) 전망’의 의미로, 유산의 전망을 둘러싼 유럽 신사사회의 오랜 희비극이 함축되어 있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