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원작 소설-힐링 에세이에 자리 뺏긴 한국소설의 ‘빈곤시대’
29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 베스트셀러 코너. 최근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한국 소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힐링 에세이와 엔터테인먼트 원작 소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송금한 기자 email@donga.com
이런 현상은 10년 전과 비교할 때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2002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0위 안에는 소설이 7권이 들어 있었다. 그중 한국소설은 5권이었다. ‘아홉살 인생’ ‘봉순이 언니’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괭이부리말 아이들’ ‘모랫말 아이들’. 당시 MBC TV 프로그램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의 영향이 컸다 하더라도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최근 한국 소설의 빈자리는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같은 ‘힐링’ 에세이와 영화 드라마 뮤지컬의 원작 소설이 점령했다. 취업난과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지쳐 있는 독자들은 소설보다 쉽고 편안한 안식처를 찾았고, 엔터테인먼트의 득세는 소설 시장까지 좌지우지하기에 이르렀다. 임자영 자음과모음 문학팀 과장은 “경기 침체 시기에 자기 계발, 치유를 통해 새로운 힘을 찾으려는 독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소설이 힘을 못 썼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박철화 중앙대 교수는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 소설에 대한 피로감으로 독자들이 외면했다”고 분석했다.
펭귄클래식코리아는 이런 추세에 발맞춰 최근 ‘두 도시 이야기’ ‘오페라의 유령’ ‘지킬 박사와 하이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셜록 홈즈: 주홍색 연구’ 5권을 묶어 뮤지컬 원작 세트를 내놨다. 펭귄클래식코리아에 따르면 지난해 8월 출간된 ‘두 도시 이야기’는 1만5000부가 팔렸다. 신인 작가의 소설이 초판 2000부가 채 팔리지 않는 현실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하지만 원작 소설을 찾는 독자층은 일반적인 소설 구매층과는 다르기 때문에 이 반사이익이 신작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확률은 희박한 것으로 출판계는 보고 있다.
○ 색깔 없는 한국 소설이 문제
경기 침체, 스마트폰과 영상매체가 장악한 시대의 흐름도 있지만, 문단 내부에 책임을 묻는 목소리도 높다. 경험이 부족한 젊은 작가들의 엇비슷한 소설이 잇따르면서 독자들이 소설을 외면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영미 펭귄클래식코리아 대표는 “젊은 작가의 작품은 흡인력이 없어 인기가 덜하다. ‘소설만 내면 무조건 베스트셀러’라는 황석영도 소구력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이름난 소설가의 작품을 계속 찾던 마니아층도 후속작이 성에 안 차서 돌아서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조영일 씨는 “2000년대 중반 일본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이 ‘한국에서 목격한 문학의 급격한 영향력 상실을 통해 근대문학의 종언을 실감했다’고 한 대목이 떠오른다”면서 “당시 한국 문단의 반발이 무척 거셌다. 하지만 소설의 존재감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그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독자를 사로잡지 못하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작가들에게 책임이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를 용인하는 문단과 평론가에게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조이영·송금한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