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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놀자!/신문박물관 들여다보기]순한글 독립신문, 뉴스 외 광고까지 실어

입력 | 2013-01-24 03:00:00


서재필(徐載弼·1864∼1951·사진) 선생은 19세기 말 역사의 격랑 속에서 근대사회의 확립과 국민 계몽을 위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을 창간했습니다. 그는 갑신정변의 기치를 올렸던 개화운동가임과 동시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 의사 자격을 획득한 지식인이자 언론인이었습니다.

최초의 민영 일간지인 독립신문은 창간일자 1면 논설을 통해 ‘상하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정부나 일반인의 잘못이 있으면 폭로하고, 본국의 실상을 알리겠노라’고 선언하는 한편 한글 전용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라는 제호로 국내 최초의 영문판을 제작하여 외국인에게 국내 사정을 정확히 알리고자 노력했습니다.

신문 발행의 필요성을 절감했던 조선은 신문사 사옥을 무상으로 임대해 주고 우송요금을 할인하는 등 독립신문 창간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습니다.

1896년 4월 7일 첫선을 보인 독립신문 창간호. 초기에는 한글판 3개면과 영문판 1개면으로 제작했다. 동아일보DB

창간 당시에는 ‘독닙신문’이라는 제호로 한글판 3면과 영문판 1면을 하나의 신문으로 편집하여 주 3회, 즉 격일로 발행했습니다. 그러나 1896년 5월 2일자 제12호부터는 제호를 ‘독립신문’으로 고쳤고 창간 이듬해인 1897년부터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했습니다. 1898년 7월부터는 매일 발행하는 일간신문이 되는 등 계속해서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평상시에는 4쪽을 발행했지만 때로는 부록을 만들었습니다. 최초의 국문 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를 실천해 한글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호외 역시 신문 최초로 발행했습니다.

독립신문은 외국 통신과 특별계약을 체결하여 다양한 내용을 신속하게 전달했습니다. 인쇄 상태 또한 우수하여 다른 신문사의 구독료보다 비쌌습니다. 하지만 서재필은 당시 어려웠던 국내 경제 상황을 고려하여 한글판 구독료를 영문판에 비해 저렴하게 책정했습니다.

독립신문에는 기사뿐만 아니라 잡화상 무역상 서적 같은 업종의 광고가 매호 평균 11개 정도 실렸습니다. 최초로 광고에 그림을 넣은 독일 무역상의 석유 광고를 게재한 적이 있습니다. 광고의 기능에 관해 해설한 글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독립신문이 광고매체로서의 기능도 충분히 수행했음을 보여줍니다.

독립신문의 창간기념일(4월 7일)은 독립신문의 발행정신과 신문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신문의 날’이기도 합니다.

이현정 신문박물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