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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국정이 서민의 애환 담은 서사시 낳아”

입력 | 2013-01-17 03:00:00

‘이조시대 서사시’ 21년만에 개정판 낸 임형택 교수




‘이조시대 서사시’ 개정판을 펴낸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 동아일보DB

“물이 막히고 산이 가려 기러기도 날아오지 않으매/한 해 다 가도록 광주(廣州) 편지 받질 못했네./지금 아이 하나 데리고 만단의 고달픔/서방님 떠나시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 유배지에서 한 여인을 소실로 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구 16수로 이뤄진 작자 미상의 ‘남당사(南塘詞)’는 다산이 해배된 뒤 강진에 홀로 남겨진 이 여인의 애절한 마음을 담았는데 이 구절을 보면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20년 무렵 강진 문인이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1999년 임형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발굴로 빛을 보았다.

1992년 출간된 임 교수의 ‘이조시대 서사시’(전 2권·창비)의 개정판이 21년 만에 나왔다. ‘남당사’를 비롯해 그동안 새로 발굴한 작품 18편을 추가해 조선시대 한문 서사시 122편을 번역해 수록하고 해설을 담았다. 임 교수는 1975년 허균의 작품 ‘객지에서 늙은 여자의 원성(老客婦怨)’을 발굴한 이래 조선시대 한시 중에서 서사시의 성격을 띤 작품들을 발굴함으로써 한국문학의 지평을 넓혔다.

이 책에서 ‘체제 모순과 삶의 갈등’ ‘국난과 애국의 형상’ ‘애정 갈등과 여성’ ‘예인 및 시정(市井)의 모습들’로 분류해 실은 각각의 시에는 서민들의 삶의 애환이 극적으로 펼쳐진다. 떠돌이 여자가 자신의 아기를 길에 버려 호랑이 밥으로 만든 기구한 사연과 18세 소녀가 아버지의 탐욕 때문에 늙은 ‘소경’에게 시집가는 정황, 극심한 가뭄과 두만강을 넘어온 쥐 떼로 고통 받는 변경민의 절규, 땅이 없어 산골로 들어왔는데 수확기에 다시 관리에게 곡식을 강탈당한 화전민의 비탄을 읽을 수 있다.

임 교수는 조선시대에 서사시가 성황을 이룬 배경으로 당시 점차 심화된 체제적 모순을 들었다. 무능한 조정과 정책의 폐해로 서민들의 애환이 커져갔던 것이다. 임 교수는 “이러한 상황을 심각하게 인식한 사대부들이 유교적 인정(仁政)과 애민(愛民)의 정신으로 투철하게 각성해 ‘서사시적 상황의 발전’에 대응한 결과물이 바로 서사 한시”라고 밝혔다.

한편 임 교수는 책 제목에 ‘조선시대’ 대신 ‘이조시대’라는 명칭을 고수한 데 대해 “이조라는 호칭이 일제의 잔재라 하여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는데, 종래 한자권에서는 왕조의 명칭을 이당(李唐), 조송(趙宋) 식으로 성을 붙여 구분 짓는 것이 관행이었다”며 “우리의 경우 단군조선, 위만조선 등과 구분 지어 이조라고 불러서 안 될 것이 없다”고 밝혔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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