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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칼럼]유리천장 깨지는 소리 들리나요

입력 | 2013-01-04 03:00:00


정성희 논설위원

동아일보 논설위원실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있었다. 언론 사상 처음으로 ‘여성 논설위원 4명 시대’가 열린 것이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남자 논설위원만 있는 언론사가 훨씬 많은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논설위원 12명 중에 여성이 3분의 1을 차지했다. 여성 논설위원이 있어도 상징적으로 한 명만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계적 명성을 가진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의 칼럼니스트도 각각 12명 가운데 단 두 명만이 여성이다.

정치부 여기자 늘린 ‘박근혜 효과’

물론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배출됐다고 해서 여성 논설위원이 늘어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연말연시 언론사 인사에서 여기자들에게 사상 초유의 승진잔치가 벌어진 것을 우연이라고 넘어가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여성 대통령 시대라는 자각이 인사권자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모 언론사의 경우 여직원 모임에서 여성 임원을 배출해줄 것을 경영진에 요청했다는 후문이다.

필자가 잘 아는 동네라 언론계를 예로 들었을 뿐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말 현대자동차그룹 인사에서 사상 처음으로 여성 임원 3명이 탄생했다. 차기 회장을 뽑는 한국과학기술인총연합회에서는 후보군에 사상 처음으로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호남 출신 김대중 대통령이 탄생했을 때 하다못해 서울 구두미화원 조직마저 권력교체가 있었다는데 여성 대통령 탄생이 가져오는 젠더 권력 변화가 왜 없겠는가.

여성 문제에 관심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까지 했던 박 당선인이 여성의 지위와 역할에 큰 변화를 가져온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2004년 4월 총선을 앞둔 3월 박 당선인이 한나라당 대표가 됐을 때 다급해진 언론사들은 최소한 한 명의 여기자를 당사에 파견하기 시작했다. 여성 당 대표를 취재하기 위해서는 화장실이나 미용실을 함께 쓸 수 있는 여자가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국회 출입 여기자는 언론계를 통틀어 한 자릿수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 비율이 30∼40%에 이른다. 물론 박 당선인의 힘만은 아니다. 교사 법조인 의사 외교관 등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언론계도 여성 파워가 거세다.

박 당선인은 여기자가 취재하기에 유리한 사람도 아니다. 일정은 물론이고 정책 인사 등 모든 게 크렘린 스타일이다. 그는 읍소 작전도, 협박 작전도 안 통하는, 참으로 기자를 힘들게 하는 취재원이다. 그런 그가 여기자의 취재영역 확대에 기여했으니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게 역사의 섭리인가 보다.

의사결정에 여자가 참여해야 양성평등

월급통장을 아내가 관리하고 남편이 용돈을 타 쓰는 나라에서 여성 지위가 낮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소리가 나온다. 그럴 만도 하다. 대학은 물론이고 대학원 입학 비율에서도 여자가 앞섰고, 교사임용시험 공무원시험 기업입사시험도 여자가 휩쓸고 있다. 남자들의 위기의식은 여성가족부 폐지와 남성부 신설 주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도 유엔은 왜 한국의 여성 지위가 낮다고 하는 건지 억울해 죽겠다는 눈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조직 내 하위층에는 여자가 넘치지만 고위층에는 드물다. 한국의 국가성평등 수준이 가장 낮다고 인식되는 부분이 ‘의사결정’(45.2%)이라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 결과와 맥락을 같이한다. 제도적으로 양성평등이 완비돼 있는데도 의사결정을 하는 최고위층으로 들어가려면 남자들이 쳐놓은 보이지 않는 장벽인 유리천장에 막히기 때문이다. 박 당선인이 한 일은 그 유리천장에 금을 낸 것이다. 이 또한 그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한번 금간 유리천장이 산산조각 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올해 우리는 여기저기서 유리천장이 깨지는 소리를 들을 것 같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