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시대<1>의미와 과제
광화문서 축하 행사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을 지지하는 젊은이들이 19일 밤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당선 축하 행사에서 율동을 하며 기뻐하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그럼에도 보수우파-진보좌파 간 유례없는 일대일 대회전(大會戰)에서 국민은 국가 최고지도자로 보수우파의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선택했다. 불과 5년 만에 ‘이념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1%도 안 되는 종북 세력이 국정을 뒤흔드는 상황을 만들 수는 없지 않느냐는, 하는 짓이 영 마뜩지는 않지만 보수 세력에게 한 번 더 위기의 대한민국을 책임지고 경영할 기회를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민의가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하지만 절반의 승리다. 박 대통령 당선인은 50%를 갓 넘긴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반대편의 절반 가까이는 박 후보를 찍지 않았다. 이는 보수와 진보의 정면승부와 더불어 2030과 5060의 국가운영 패러다임을 둘러싼 유례없는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번처럼 부모 세대와 자식 세대가 ‘7 대 3’ ‘3 대 7’의 구도로 격렬히 맞선 적은 없었다. 역대 대선에서 ‘독립변수’로 작용했던 지역 갈등이 ‘종속변수’로 밀려나고 세대갈등이 독립변수의 자리를 대체한 선거로 18대 대선은 평가될 것으로 보인다.
국민들 팍팍해진 삶에 지쳐
이번 대선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가로로는 이념으로 갈라지고 세로로는 세대로 두 동강이 나 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념 갈등과 세대 갈등이 복잡하게 뒤얽힌 ‘십자형 민의’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불안’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보수건 진보건, 2030이건 5060이건, 또 그 사이에 낀 40대건 할 것 없이 국민 대부분은 갈수록 팍팍해지는 삶에 고달파하며 각자 살길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만인 대 만인의 투쟁’처럼 첨예하게 맞서 있다는 것. 이게 ‘52 대 48’의 표심으로 농축돼 발현된 것이라는 게 선거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박 당선인은 ‘대탕평 인사’도 약속했지만, 이 또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5년 단임제하에서 적진의 인사가 ‘변절자’라는 비난을 감수하며 박 당선인이 내민 손을 선뜻 잡을 리 만무하다는 점에서다. 몇 자리 ‘떡고물’ 나눠주는 식의 시혜적 ‘지역안배’ 자세로는 국민통합은 요원하다.
박 당선인의 핵심 슬로건인 ‘70% 중산층 시대’가 5년 집권 내에 달성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예상키 어렵다. 작금의 경제위기 상황이 1997년 외환위기 못지않게 나쁘다는 게 경제 전문가들의 진단이기 때문이다. 지난 5년에 이어 향후 5년에도 3% 수준의 저성장이 계속될 것이라는 예측 속에 “18대 대통령은 가장 불행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경제민주화-성장의 조화를
경제민주화와 경제성장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도 박 당선인이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다. 재계와 노동계가 윈윈의 양 날개를 펼치도록 재계와 경제계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설득 리더십’은 온전히 박 당선인의 몫일 것이다.
G2(미국과 중국)의 대결, 일본의 극우경화, 북한 김정은 체제의 불확실성, 장거리 로켓 발사에 따른 한반도 주변국의 군비 경쟁 우려 등 첫 여성 군 통수권자 앞에는 민감한 외교안보 현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현 정부 5년 내내 이어져온 꽉 막힌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은 난제다. 보수 기조를 확고히 견지하되 남남갈등의 요소를 가급적 최소화하며 중도의 지지를 얻고 합리적 진보도 공감할 수 있는 대북정책의 큰 그림이 나오기를 국민은 기대하고 있다.
남북관계 돌파구 찾아야
사실 이번 대선 기간 내내 보수는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대선에서 신승하긴 했지만 떠들썩하게 축배를 들 분위기는 아니다. ‘박근혜 개인기’로 진보의 공세를 막아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다. 자기혁신 노력을 게을리 하는 ‘낡은 보수’에겐 더이상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국회의원 감축을 포함한 각종 정치쇄신안을 새누리당이 앞장서 강력히 추진해야 하는 이유다. 검찰 등 무소불위로 여겨져 온 권력기관 개혁도 임기 초반 타이밍을 놓치면 물거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역대 정권에 참여했던 인사들의 조언이다. 권력 분산을 포함한 개헌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잔치는 끝났다”며 정치쇄신을 미적대며 입을 씻는 순간 제2, 제3의 안철수가 등장해 정치권의 기득권 세력을 강타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박 당선인은 요즘 트렌드인 ‘수평형 리더십’ ‘개방형 리더십’ ‘소통형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보수 내에서도 박 당선인에게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권위적 리더십’이 연상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적잖다. 경제 민주화 못지않은 ‘권력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게다가 청와대는 ‘권위적인’ 구조와 분위기 탓에 대통령과 참모의 심적 간극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자유롭게 참모들의 ‘쓴소리’가 오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급선무라는 지적도 많다.
‘어머니의 마음’ 잊지말길
전문가들 사이에서 올해 20년 만에 총선과 같은 해 실시된 18대 대선은 1987년 못지않은 정초(定礎)선거로 인식돼 왔다. 향후 오랫동안 계속될 국가의 미래를 결정하고 사회의 기본틀을 잡는, 주춧돌을 놓는 선거라는 의미에서다. 박 당선인은 이를 ‘시대교체’라고 규정했다. 그, 두 개의 선거에서 새누리당은 연거푸 승리했다. 오만은 금물이다. ‘여대야소’로 임기를 거의 같이하며 5년 더 국정을 운영하게 된 박 당선인에겐 선진국 문턱에서 좌절을 거듭하는 우리 사회에 새로운 발전모델을 제시하고, 경제를 옥죄는 낡은 정치 시스템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할 막중한 책임이 놓여 있다.
이번 대선에서 대거 투표장을 찾은 3000만 유권자들의 엄숙한 행렬은 서로 다른 가치와 지향을 가진 두 개의 큰 ‘물결’이었다. 상생의 정치로 이 물결을 융합해 국가적 에너지로 승화시키고 향후 10년, 20년의 성장동력을 만들어내라는 게 이번 대선 과정의 저변에 흐르는 민의다.
20일 ‘차기 대통령으로서의 첫 새벽’을 맞게 될 박 당선인은 공식 일정에 앞서 홀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상념에 잠길 것이다. 흉탄에 잃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며 잠시 감회에 젖기도 하고, 자신의 어깨에 지워진 사명감을 느끼며 깊은 심호흡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2개월 뒤 박 당선인은 33년여 만에 청와대로 다시 들어간다. ‘박정희의 딸’이 아닌 ‘18대 대통령 박근혜’로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민생대통령이 되겠다”는 그의 다짐은 국민의 뇌리에 박혀 있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