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첫 시찰지가 선전市20년전 덩샤오핑 순행지 선택… 즉석 인터뷰 등 파격행보 계속후주석은 마오 혁명성지 순례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가운데)가 8일 개혁·개방 1번지이자 덩샤오핑의 동상이 있는 광둥 성 선전 시 롄화산 공원에 들러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왕양 광둥 성 서기(왼쪽)가 시 총서기를 수행하고 있다. 사진 출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 “부국, 부민의 길 흔들림 없이 견지”
9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시 총서기는 8일 오전 9시 55분 선전 시 롄화산(蓮花山) 공원의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하고 절했다. 그는 현장을 지켜보던 주민들에게 “당의 개혁개방 결정은 정확한 것이었다”며 “부국(富國) 부민(富民)의 길을 흔들림 없이 견지할 뿐 아니라 새롭게 개척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시 총서기는 동상 주변에 기념식수를 한 뒤 인근 뤄후(羅湖) 어민촌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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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9일 베이징(北京) 국가박물관을 방문할 때 교통관제를 하지 않았던 시 총서기는 이날 행사에서도 파격 행보를 이어갔다. 보안요원들이 공원에 있던 관광객을 격리하지 않아 자유롭게 시 총서기 사진을 찍었을 뿐 아니라 헌화할 때도 붉은 카펫을 깔지 않았다.
또 중국 관영매체를 동원하지 않았으며 군중 속에 있던 홍콩 기자 2명에게 즉석 질문을 할 기회를 줬다. 그는 기자들에게 “홍콩은 계속해서 번영을 구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쓰촨(四川)에서 온 한 관광객은 시 총서기와 예정에 없던 악수를 한 뒤 “이런 일이 생길 줄 생각도 못했다”며 감격했다.
시 총서기는 8일 오후 선전을 떠나 광둥 성 주하이(珠海)에 도착해 헝친(橫琴)신구에서 개발계획을 보고받았다. 그는 이후 광저우(廣州)를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 후진타오는 마오를, 시진핑은 덩샤오핑을 첫 시찰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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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개방 1번지’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선전을 방문한 것은 그가 취임 초기 강조한 국정지표를 재확인하는 과정에서의 화룡점정(畵龍點睛)으로 풀이된다. 또 덩샤오핑을 자신의 정치 모델로 삼겠다는 뜻을 대내외에 천명한 정치행위라는 분석이 나온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2002년 12월 5일 총서기 취임 후 첫 지방 시찰지로 허베이(河北) 성 스자좡(石家庄) 시 시바이포(西柏坡)를 선택했다. 시바이포는 마오쩌둥(毛澤東)이 1949년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을 본토에서 몰아낸 뒤 베이징에 입성하기 직전에 마지막 농촌지휘소로 삼았던 곳이다.
후 주석이 혁명성지인 시바이포에 들러 마오쩌둥의 계승자 지위를 확보하려 했다면 시 총서기는 ‘남순 루트’를 답사하며 덩샤오핑의 유전자(DNA)를 물려받았다는 점을 명확히 해 차별성을 부각시킨 셈이다. 홍콩 밍(明)보는 덩샤오핑이 남순강화 때 장녀 덩린(鄧林)을 데리고 다닌 것처럼 시 총서기가 딸 시밍쩌(習明澤)와 동행했다고 보도해 이번 순방을 치밀하게 기획했음을 가늠케 했다.
선전은 시 총서기의 부친인 시중쉰(習仲勳)이 광둥 성 서기로 있던 1979년 보수파의 반발을 무릅쓰고 덩샤오핑에게 특구 지정을 건의해 관철시킨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행보가 개혁개방에 반대하는 좌파들을 겨냥한 게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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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샤오핑이 1992년 1월 후베이(湖北) 성 우창(武昌)을 거쳐 광둥 성 선전과 주하이, 상하이(上海) 등 남부 지역을 돌며 중단 없는 개혁·개방을 역설한 것. 중국의 1978년 개혁·개방 노선은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겪으면서 보수파들로부터 심각한 견제를 받았다. 덩은 남순강화를 통해 ‘생산력과 국력, 인민들의 생활수준 등 3개 요소에 이로우면 결국 좋은 것’이라는 3개유리(三個有利)론을 제시하며 당과 국민이 개혁·개방에 매진할 것을 촉구했다. 남순강화 이후 개혁·개방은 중국의 큰 국정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베이징=고기정 특파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