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프로야구 선수로선 그저 그런 대주자 요원이었다. 프로 10년간 통산 타율은 1할대(0.195)에 불과했다. 누가 봐도 이름 없이 잊혀질 수많은 선수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야구를 놓지 않았다. 야구단 운영팀 직원을 거쳐 선수를 가르치는 코치가 됐고 이젠 한 구단의 감독 자리에 올랐다.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 딱 넥센 염경엽 감독(44)을 위한 말이다. 23일 목동구장에서 염 감독을 만나 그의 인생과 야구를 들었다.
○ 대주자 염경엽
넥센 염경엽 감독이 현대에서 뛰던 1997년 모습. 당시 그는 대주자로 근근이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이때부터 지도자로의 전향을 준비했다. 동아일보DB
자존심이 상한 그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려 했다. 당시 캐나다는 자국에 도움이 될 만한 다른 나라의 유명 스포츠인에겐 바로 영주권을 내주는 정책을 썼다. 그러나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가 대사관에 제출한 사업계획서에 1순위로 사업을, 2순위로 야구교실을 적어내는 바람에 영주권 심사에서 탈락했다. 캐나다 측에서 사업을 우선하는 자는 자국 체육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떨어진 실력에 이민을 가려고 한눈까지 팔았으니 야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1996년부터 대주자, 대수비 요원으로 전락한 그는 2000년 현대가 우승한 후 쓸쓸히 유니폼을 벗었다.
○ 운영팀 염경엽
은퇴한 그는 2001년 야구단 운영팀 과장이 됐다. 현대 구단으로선 최초의 선수 출신 직원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남들과 다르게 일하는 법을 찾는 데 집중했다.
선수의 경험이 담긴 보고서는 이전의 것들과 확실히 달랐다. 신망을 얻은 그는 운영팀장 대행에 스카우트 업무까지 맡았다. 그는 “일이 너무 많아서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하기가 그렇게 싫었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처음 운영팀을 맡을 때 현대와 했던 약속 때문”이라고 했다.
염 감독은 원래 코치를 맡고 싶었다. 그래서 대주자 시절부터 더그아웃에서 상대 투수의 ‘구세’(투수가 공을 던질 때의 세밀한 습관)를 유심히 관찰하고 이를 메모해왔다. 외국 야구교본도 모조리 사들여 읽었다. 이를 잘 아는 현대는 2001년 그에게 운영팀 자리를 제안할 때 “2년만 이 일을 해주면 코치를 시켜주겠다”고 했다. 약속한 2년이 지났지만 구단은 “1년만 더 해 달라”고 말을 바꿨다. 또 1년이 지났지만 구단의 대답은 똑같았다. 그 다음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마다 사표를 쓰며 ‘저항’했지만 구단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는 “운영팀 일을 너무 잘한 게 화근이었다”며 웃었다.
○ 코치 염경엽
‘염경엽표’ 넥센이 23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감독-선수 상견례를 시작으로 돛을 올렸다. 평범한 대주자에서 구단 직원, 코치를 거쳐 감독까지 오른 그가 보여줄 또 다른 성공 스토리는 무엇일까. 넥센은 31일 일본 가고시마로 전지훈련을 떠난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야구백과사전’을 쓰려고 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당시 넥센 김시진 감독의 주루코치 제안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4년 만에 친정 현대의 후신인 넥센으로 돌아왔다. 그는 “친정팀에 와서 적응하는 데 딱 10일 걸렸다. 그게 친정의 힘”이라며 웃었다.
염 감독의 대주자 경험은 주루코치를 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선수 시절 더그아웃에서 봐두었던 투수의 사소한 습관을 고스란히 전수했다. 올 시즌 박병호와 강정호가 처음으로 20홈런-20도루를 달성한 것도 그의 덕이다. 그는 올해 스프링캠프에서 도루와 거리가 멀었던 둘을 불러 “이진영이 2008시즌 후 자유계약선수(FA)로 성공한 건 두 자릿수 도루를 했기 때문”이라고 설득했다.
○ 감독 염경엽
염 감독은 10일 넥센의 사령탑에 올랐다. 올 시즌 팀을 도루 1위(179개)로 끌어올린 공을 인정받았다. 감독이 된 그는 또 새로운 시도를 했다. 선수단 상견례(23일) 전인 21, 22일 모든 코칭스태프와 1박 2일의 워크숍을 가진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올 시즌의 과오를 되짚으면서 다음 시즌 목표를 제시했다. 그 목표는 ‘4강’이나 ‘우승’ 같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그의 성격처럼 세밀한 것이었다. 타자에겐 팀 출루율 1위와 최소 삼진, 투수에겐 최소 볼넷과 최소 도루시도 허용을 주문했다.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야 선수들이 집중한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투수 및 타격코치는 이 자리에서 시즌 중에 말하지 못했던 여러 문제점에 대한 해법을 주고받았다.
염 감독은 선수와 구단 직원, 코치를 모두 경험한 몇 안 되는 감독이다. 현장과 구단을 모두 잘 아는 그는 “모든 오해는 소통 부재에서 생긴다”고 했다. 그는 “만약 구단 고위 관계자가 감독의 작전과 선수 기용에 의문을 품으면 그 즉시 감독에게 이유를 물어 이를 풀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과정이 없어 오해가 커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염 감독은 이미 2군 시스템 개혁, 새 포수 영입 등 혁신에 돌입했다. 그에게 다음 시즌 예상 성적을 물었다. 대답은 단호했다. “커리어가 하나도 없는 내가 입으로 아무리 말해봤자 의미 없다. 다음 시즌에 뭐든 직접 보여주겠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