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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ose Up]세입자도 집주인도 우는 ‘2012 슬픈 가을’

입력 | 2012-10-26 03:00:00

전세 급등… 집값 추락… 갈등 도미노




“저도 비싼 전세금 주고 들어오려니 속상한데 떠밀려 나가는 기존 세입자는 오죽했겠어요. 당연히 뿔이 났죠.”

제법 날씨가 쌀쌀했던 24일 서울 송파구 잠실동 리센츠 아파트. 새로 전세를 얻은 김모 씨(34) 부부가 입주할 아파트의 기존 세입자는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잔금 9000만 원을 예정보다 2시간 늦게 보내주게 됐다는 이야기가 화근이었다.

김 씨 부부의 짐이 문 앞에 도착해 있는데도 돈을 늦게 받게 된 기존 세입자는 “문을 잠그고 갈 테니 (잔금이 입금되는) 오후 3시에나 들어가라”고 ‘몽니’를 부렸다.

이 아파트는 김 씨 부부가 올여름 두 달 넘게 발품을 팔아 간신히 구한 전셋집이었다. ‘잠실 리센츠’의 전세금은 매매가의 60∼70%에 육박할 정도로 높았지만 너무 인기가 많아서 매물이 부족할 정도였다. 8월 말 부랴부랴 7000만 원을 은행에서 빌려 전용면적 84m²를 5억2000만 원에 계약했다.

곧 기존 세입자의 심술이 시작됐다. 도배를 하기 위해 집안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지난번에 보지 않았느냐. 싫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존 세입자는 2년 전 3억9000만 원 전세로 이사 왔다가 전세금이 5억 원 이상으로 뛰자 다른 곳으로 밀려나야 할 처지였다.

전세금을 올린 집주인도 사정이 어렵긴 매한가지였다. 경기 성남시 분당에 전세를 사는 집주인도 전세금이 뛰는 바람에 잠실 아파트 전세금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숨을 내 쉬었다. 게다가 올해 초까지 9억5000만 원을 웃돌았던 집값은 지금 1억 원 넘게 떨어졌다.

집주인은 집값이 계속 떨어지는 데다 보유세를 비롯한 각종 유지비용을 내야 하니 남는 게 없다는 표정이었다. 특히 전세금을 올려 받아 봤자 지금 사는 분당 아파트의 전세금을 내주고 나면 끝이라며 갑갑하다고 말끝을 흐렸다.

서울 전세시장이 또 한번 고공비행 중이다. 닥터아파트가 12∼19일 일주일간 서울 전세금 변화를 조사한 결과 1000만 원 이상 오른 아파트는 33개 단지였다. 광진구 광장동을 비롯해 용산구 이촌동, 문배동, 한강로3가 등의 전세금이 초강세였다.

▼ “전세대란 이번이 마지막 될 수도 있다” ▼


24일 직접 둘러본 용산구 이촌동의 부동산중개업소에서 만난 몇몇 세입자들은 껑충 뛰어버린 전세금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L부동산 관계자는 “한가람 아파트 59m²는 지난해 2억2000만 원이면 들어갔는데 이제 3억2000만 원”이라며 “세입자들이 눈 깜짝할 새 1억 원을 올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부동산중개업계는 최근 전세금이 급등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 제시했다. ‘윤달이 끼어서 1년 내내 신혼부부가 많다’ ‘전세매물 자체가 적다’ ‘전세금이 올라간다 싶으면 집주인들이 너도나도 올리려고 한다’는 등 분석이 분분했다. 하지만 집값 하락이라는 방아쇠가 당겨지자 세입자와 집주인 모두 딱한 처지로 몰리는 ‘연쇄반응’이 일어난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세입자들은 갑자기 오른 전세금에 허덕거린다. 전세금을 올려주지 못해 쫓겨나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수천만 원을 올려줘야 한다. 아무리 전세금이 올랐다 해도 집을 사려고 마음먹기는 쉽지 않다. ‘지금이 과연 바닥일까’란 의심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막 아이를 출산한 주부 이모 씨(34)도 11월 전세 만기를 앞두고 새 전셋집을 구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결혼한 뒤 살아온 마포구 망원동 아파트 84m² 집주인이 2년 전 1억9000만 원이었던 전세금을 2억5000만 원으로 6000만 원이나 올려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렵다고 울상을 짓자 집주인은 ‘내가 들어갈 테니 나가달라’고 말했다.

주변 아파트 전세금은 벌써 훌쩍 올라 있었다. 괜찮다 싶어 하루 이틀 고민하다 전화를 걸어보면 이미 계약이 끝나 있기 일쑤였다. 서대문, 광화문까지 애를 들쳐 엎고 집을 보러 다니다 아예 아파트를 사버릴까도 생각해봤다. 그가 모아놓은 자금은 3억 원가량. 1억 원 정도 더 보태면 망원동 아파트는 살 수 있지만 일단 그 생각은 접었다. 이 씨는 “과거 같으면 1억 원 대출 받아 바로 집을 구매했겠지만 집값이 떨어질 때 무리해서 집을 살 이유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집주인들도 울상이긴 마찬가지다. ‘전세제도’는 적은 돈으로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3억 원짜리 집을 1억5000만 원의 전세를 끼고 사면 구입자금은 1억5000만 원만 있으면 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값이 오르면서 자산가치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어 전세 끼고 집을 사는 방식은 무조건 유리했다. 하지만 집값이 떨어지니 이 방식은 더이상 효력이 없게 됐다.

집주인이 대출금까지 안고 있으면 괴로움은 더 커진다. 2010년 재건축한 강남구 역삼동 그레이튼 아파트 85m²는 한때 시세가 11억5000만∼12억 원을 오르내렸다. 그러나 지금은 9억7000만 원에 내놓아도 팔리지 않는다. 집값이 주택담보대출금(3억 원)과 전세금(6억5000만 원)을 더한 값과 비슷한 소위 ‘깡통아파트’ 일보 직전이기 때문이다. 전셋집을 찾던 세입자들도 “만약 경매 처분됐을 때 선순위 은행 대출금을 빼고 나면 전세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할 수 있다”고 피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레이트 아파트 집주인인 이모 씨(50)는 2년 전에는 은행대출과 전세보증금을 빼도 집을 팔면 3억 원 이상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지금은 2년 치 보유세와 집값 하락분 2억2000만 원 등을 모두 날리다시피 한 신세가 됐다.

기존 세입자는 쫓겨나고 새 세입자는 온갖 고생 다하며 거액의 전세금을 마련해야 하고 집주인은 집값 떨어져 손해 보는 악순환 속에 한국에만 있는 전세제도의 시효가 다해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지금까지 전세는 ‘집값이 꾸준히 오른다’는 전제 아래 모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다. 세입자는 적은 돈으로 집을 구할 수 있고 집주인은 전세보증금이란 목돈을 활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시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김현아 건설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요즘 전세대란은 근본적으로 전세로 놓는 집이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라며 “10∼15년 새 오피스 시장에서 전세가 사라졌듯이 주거시장에서도 이미 소형은 월세로 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심리적인 저항이 있겠지만 결국에는 주거시장도 전세에서 월세로 옮겨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선구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는 정부가 줄어든 전세 물량의 일부를 공공임대로 흡수해 임대시장을 안정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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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윤정 기자 yunjung@donga.com  
김수연 기자 suy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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