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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 사람이 사는법]낙원상가 ‘현대악기’ 배기수 씨

입력 | 2012-09-22 03:00:00

“기타에 목숨 건 학생들 살려야죠”… 문 닫은 수리점 다시 열어




“흘끗 봐도 다 알지.” 배기수 씨의 기타 넥 수리 실력은 낙원상가 최고 수준이다. 기타를 들어 한 번 내려다보고는 거침없이 소켓 렌치를 집어 든다. 20일 오후 배 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악기수리점 현대악기에서 수리를 의뢰받은 기타를 살펴보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 2002년 여름의 어느 날, 그는 서울 종로구 낙원상가 2층 기타 수리점의 문을 닫아 버렸다. 돈이 없는 학생들에게 수리비를 깎아주기로 유명한 가게였다. “돈은 벌 만큼 벌었고 이제는 먹고살 만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가게를 하며 몸이 많이 상한 것도 이유였다. 기타를 고칠 때마다 습관적으로 입에 물었던 담배는 기관지를 망가뜨렸다. 담배를 피우고 난 후에는 항상 목이 아팠고, 목소리도 탁해졌다. 언제나 작업대를 내려다보며 일을 하다 보니 목 디스크까지 왔다. 연장을 쥐는 오른손에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그는 서울 성동구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병실에 누워 있으면 아침저녁으로 담당 과장과 인턴 의사들이 왕진을 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과장의 등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몇 년 전 기타 수리를 맡기러 왔던 앳된 대학생이 어느새 인턴 의사가 돼 있었다. 》
그는 자신을 알아보는 인턴에게 “더는 일을 안 할 작정”이라고 했다. 인턴이 놀라서 말했다. “제가 약은 얼마든지 좋은 걸로 지어 드릴 테니 제발 빨리 나으셔서 다시 낙원상가를 지켜 주세요. 사장님이 없으면 돈 없는 우리 학생들은 어쩌란 말인가요.”

배기수 씨(73)는 다시 낙원상가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번엔 2층의 번듯한 매장이 아니었다. 악기수리점 ‘현대악기’는 상가 1층으로 내려오는 계단 밑 5평 남짓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원래는 분식집이 있던 곳이었다. 가게 문을 닫은 지 불과 한 달 만이었다.

지금이야 유리문에 시트지로 만든 가게 이름이 붙어 있지만,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구태여 만들지도 않았다. 그는 “지금도 간판은 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손재주가 있고, 변함없이 그를 찾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일을 안 하면 더 늙어.” 그는 20일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한 시간 동안 기타 세 개를 뚝딱 고쳐 냈다.

○ 해군 상병 배기수, 기타를 만들다

배 씨는 군 시절 배에서 처음 기타와 마주쳤다. 그는 1958년 열아홉의 나이에 일찌감치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어느 날 휴가를 나갔던 하사가 일제 기타 한 개를 들고 왔다. 그때는 기타가 동네에 한 개 있을까 할 정도로 귀했다. 그는 어깨너머로 기타를 배웠다. 그러다 갑자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이까짓 것, 내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군 생활 2년을 거의 채워 갈 무렵이었다. 휴가 때 하사의 기타를 빌려 들고 나왔다. 경남 고성군의 집으로 돌아와 휴가 15일 동안 꼬박 작업에 매달렸다. 처음엔 기타 소리가 어떤 원리로 나는지도 잘 몰랐다. 가져 온 기타를 찬찬히 뜯어 보고 똑같이 흉내를 내 만들었다. 합판으로 보디(몸체, 울림통)를 만들고 통나무를 깎아 넥(지판이 있는 목 부분)을 만들었다. 완성된 기타는 조잡했지만 분명 또렷한 소리가 났다. 첫 작품치고는 만족스러웠다.

“삼익악기 고(故) 이효익 회장이 나와 같은 고성 출신이었어. 어느 날 내가 기타를 등에 멘 채로 이 회장에게 인사를 하러 갔거든. 그분이 날 보고 ‘그 기타 어디서 났느냐’고 묻더라고. 그래서 ‘제가 하나 만들어 봤지요’ 했지. 이 회장이 나를 보통 놈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아무것도 모르는 놈이 멀쩡한 기타를 한 개 만들었으니. 그 길로 이 회장을 따라 서울에 올라왔어.” 그는 삼익악기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스물셋이었다.

배 씨는 3년에 걸쳐 일본 나고야와 고베 등으로 ‘기타 유학’을 다녔다. 회사 덕이었다. 기타 재료 고르는 법부터 마무리 작업까지 꼼꼼히 배웠다. 일본 기술자들의 솜씨는 대단했다. 접착제를 쓰지 않은 조립제품도 마치 강력접착제를 쓴 것처럼 튼튼했다.

하루는 공장의 ‘한초(班長·반장)’가 다가왔다. 일본 청주 한 병을 걸고 일대일 내기를 하자고 했다. 기타 넥을 누가 더 빨리 정교하게 만들어 내는지 겨루자고 했다. 몸통 쪽으로 다가갈수록 간격이 조금씩 좁아지는 프렛(Fret·줄 누르는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지판에 박는 금속)을 정확하고 튼튼하게 박아 넣어야 하는 작업. 결국 배 씨가 이겼다. 그리고 좋은 기타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 미군 무전기 부품 기타서 ‘깁슨’ 소리가

그도 한때는 공장 사장이었다. 삼익악기를 나와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작은 공장을 거쳐 1990년에는 인천 부평구 4공단에 기타 제조 공장을 열었다. 운영이 잘될 때는 45명이나 되는 직원이 한 달에 이틀만 쉬며 작업을 해서 한 달에 기타 5000대를 미국에 납품하기도 했다.

하지만 악화되는 경영 환경이 발목을 잡았다. 땅값과 인건비가 계속 올랐다. 공장을 유지하기 점점 어려워졌다. 위기를 느낀 다른 업체들은 앞 다퉈 중국으로 공장을 옮겼다. 제조 장비를 옮길 때 중국에서 금전적인 혜택을 준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는 며칠간의 고민 끝에 결국 중국행을 포기했다. 그는 돈 버는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냥 기타가 좋을 뿐이었다. 1994년 공장을 완전히 정리하고 낙원상가로 들어왔다.

가끔은 아쉽다. 미국이나 일본 기타에 뒤지지 않는 최고 품질의 기타를 만들어 보지 못해서다. 전자기타의 픽업(기타 줄의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꿔 주는 부품)을 만들어 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적당한 재료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재료로는 아무리 해도 좋은 소리가 나질 않았다. 결국 픽업 생산을 포기했다. 한번은 그가 미8군에서 쓰던 무전기에 들어 있던 영구자석과 코일을 구해 시험용 픽업을 만든 적이 있었다. “중고 재료로 엉성하게 만들었는데도 ‘깁슨’(미국의 유명 기타 브랜드) 소리가 났어. 나도 좋은 재료가 많았으면 더 좋은 기타를 만들었을 텐데….”

인심 좋은 ‘배 사장님’은 여전히 가난한 기타리스트들의 우상이다. 인터넷에는 ‘기타 줄만 교체하러 갔는데 다른 부품도 교체해 주고, 줄의 높낮이까지 조절해 주고, 가격도 깎아 줬다’는 경험담이 여럿 올라와 있다. 그는 “가난하게 음악 하는 학생들을 보면 내 자식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퇴근 후에는 가끔 단골손님이나 대학생들과 맥주 한잔을 기울인다. 그때마다 그는 항상 이야기한다. “공부는 내가 너희를 못 따라가지. 그래도 인생은, 너희가 날 못 따라온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