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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중의 한자로 읽는 고전]장지명산(藏之名山)

입력 | 2012-09-20 03:00:00

藏: 감출 장 之: 어조사 지 名: 이름 명 山: 뫼 산




제대로 된 평가를 위해 깊이 감춰두고서 기다린다는 의미다. 사마천이 ‘사기’ 130편을 완성하고 나서 그것이 몰고 올 파장에 대한 깊은 두려움으로 말한 것이다. “그것(책)을 명산에 감춰두고 부본(副本)은 수도에 두어 후세의 성인·군자들이 열람하길 기다린다(藏之名山, 副在京師, 俟後世聖人君子).” 사기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방대한 분량의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은 인간과 권력을 다룬 이 책의 예사롭지 않은 운명을 예감했다. 그의 말처럼 사기는 오랫동안 왕실과 역사가들에게 외면 받으며 몇 세기를 보내야 했다. 그런 비판의 이면에는 사기가 90년 늦게 나온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달리 도가와 병가, 잡가 등 제자백가를 두루 다뤄 한 대의 국가 이념인 유학에 배치된다는 인식이 있다.

사마천은 자객과 점쟁이, 유세가, 의사 등 당시 세상의 비주류들을 과감히 역사의 주류로 등장시켰다. 예를 들어 형가(荊軻)가 연나라에서 거문고와 비슷한 악기인 축(筑)의 명수 고점리(高漸離)와 비파를 타면서 술 마시고 노래하는 호방함, 그가 태자 단의 눈에 들어 진시황 암살계획을 도모하는 이야기들은 사마천이 아니면 쓰기 힘든 소재일 수밖에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사마천에게 궁형의 치욕을 안긴 한 무제에 대한 비판적 서술 시각의 문제다. 무제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아버지 경제(景帝)와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 신랄하게 비판한 것을 보고 매우 노여워하며 이 두 본기(本紀)를 폐기하도록 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사기가 소외의 시간만 보낸 것은 아니었다. 당(唐)나라의 문장가 유종원(柳宗元)은 사기를 ‘웅심아건(雄深雅健)’이라고 평가하면서 문장 학습의 기본 틀로 삼았고, 구양수(歐陽脩)는 애호가로서 글을 지을 때 이용하기도 했다. 사기의 위상은 청대(淸代)에 기윤(紀윤)과 조익(趙翼), 장병린(章炳麟) 등에 의해 더욱 확고해졌으며 근대 중국의 루쉰(魯迅) 역시 ‘천고(千古)의 절창(絶唱)’이라고 칭송했다.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