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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 책의 발끝을 잘랐나

입력 | 2012-08-29 03:00:00

■ 출판사 영업부장들이 말하는 ‘베스트셀러 만들기’




서점의 비표(도장)가 찍힌 밑면을 2∼3mm 절단한 책(가운데). 작아진 사이즈에 맞춰 새 표지를 입히기도 한다. 양장본의 경우엔 책을 자르지 못한다.

출판계 사재기 감시기구인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는 소설가 겸 수필가 남인숙의 ‘어쨌거나 남자는 필요하다’(자음과모음)에 대해 ‘사재기 의심’ 결정을 내렸다. 센터가 서점들로부터 구매 기록을 받아 살펴본 결과 여러 사람이 일정 기간 반복적으로 이 책을 구매해 동일 주소지에서 받아본 것이 확인됐다. 지난해 12월 출간된 이 책은 주요 서점의 종합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었다. 출판사는 “사재기는 없었다”고 강력히 부인했지만 곧 과태료 처분이 내려질 예정이다. 윤철호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 운영위원장은 “사재기를 부인한 출판사에 과태료를 부과한 첫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서 사재기는 출판사가 자신의 책을 다량으로 구입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림으로써 판매를 촉진하는 것으로,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따라 과태료 최고 1000만 원이 부과되는 엄연한 불법 행위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재발하는 출판계의 고질병이기도 하다.

○ ‘키 작으면’ 사재기했던 책?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는 2008년 9월 출범 이후 현재까지 총 8건의 사재기 의심 사례를 적발했고 이 중 5건에 과태료를 부과했다. 지난달 과태료 상한선이 1000만 원으로 인상되기 전에는 300만 원이 최고액이었다. 한 출판사 대표는 “일단 베스트셀러에 올라가면 최소 1만 부가 나가도 순이익이 2000만 원가량 되니 과태료는 ‘껌값’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본보는 출판사 대표, 영업부장들로부터 사재기 실태를 들어봤다. 직원이나 아르바이트생이 대형 서점을 돌며 책을 한 권씩 구입하는 ‘방문 사재기’의 경우 한 사람이 딱 한 권만 산다. 서점들이 사재기를 막기 위해 한 명이 여러 권을 사도 판매 집계에는 한 권만 적용하기 때문이다. 출판사는 이렇게 사온 책들을 서점의 비표(도장)를 지워 다시 출고한다. 특수 약물을 써서 지우기도 하고 얼룩이 남으면 절삭기를 이용해 2∼3mm씩 잘라내기도 한다. 한 출판사 대표는 “서점에서 동일한 책들 가운데 살짝 ‘키가 작은’ 책은 사재기 후 다시 출고된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 독서카페 서평 이벤트도 이용

일부 인터넷 ‘독서카페’나 ‘서평카페’에서 열리는 서평 이벤트도 이용한다. 누리꾼들이 책을 산 뒤 계좌번호를 알려주면 출판사가 책값을 입금한다. 회원은 공짜 책을 얻고, 출판사는 매출을 올리면서 독자 서평까지 챙긴다. 이들을 연결해준 독서 카페 운영자들이 출판사로부터 수수료를 챙기기도 한다. 사인회도 마찬가지다. 독자 외에도 서점 직원들이 사인을 받는데 이는 출판사가 해당 서점에서 구매한 책들이다. 단속과 엄포에도 불구하고 왜 사재기가 근절되지 않을까. 한 출판사 관계자는 ‘최소비용 최대효과’를 이유로 꼽았다. 정가 1만 원짜리 책을 사재기할 때 인터넷 서점을 통해 구입하면 10% 할인을 받아 9000원에 살 수 있고, 책은 다시 6000원을 받고 재출고할 수 있다. 결국 3000원만 쓰면 1만 원짜리 책 한 권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셈이다.

한 대형 서점 관계자는 “1분 단위로 판매량의 이상 증가를 살피는 등 여러 사재기 방지책을 내놓았지만 지능적으로 변하는 사재기를 미리 차단하기 힘든 실정”이라고 말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신나리 기자 journ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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