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길을 말해주는 사주명리학… 핵심은 ‘앎’
물론 육십갑자의 이치를 통달하려면 아주 높은 경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 다 깨달은 후 ‘삶의 기술’로 쓰는 건 아니다. 한글의 원리를 다 터득한 다음 한글을 쓰는 게 아니고, 디지털의 오묘한 이치를 깨친 다음에야 스마트폰을 쓰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즐기고, 배운 만큼 쓰면 된다. 문제는 이 앎의 향유를 가로막는 마음의 장벽이다.
먼저 음양오행론 혹은 사주명리학은 도인이나 무속인의 전유물이라고 간주하는 습속이 있다. 이런 표상에는 이중적인 방식의 배제가 작동한다. 사주명리학을 고매하고도 신비로운 차원으로 여기는 것, 혹은 지식 이하의 저급한 술수로 취급하는 것. 신비 혹은 미신. 두 가지 모두 명리학을 ‘지식의 외부’로 축출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이때 지식의 범주와 경계는 철저히 서구적 인식론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서구의 시선으로 다른 지역의 문화를 타자화하는 것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일종이나 다름없다.
자연의 이치 속에서 존재와 운명의 비의를 탐색하고자 한 인류의 노력은 아주 연원이 깊다. 에니어그램과 별자리, 수상과 관상, 풍수지리 등 인류가 고안해 낸 다채로운 운명론 가운데 사주명리학은 단연 독보적이다. 무엇보다 의학과의 긴밀한 결합이 가능하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음양오행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몸과 우주, 그리고 운명을 하나로 관통하는 ‘의역학’이라는 배치. 말하자면 가장 원대한 비전 탐구이면서 동시에 가장 실용적인 용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이 우연일 뿐이라면 개입의 여지가 없다. 또 모든 것이 필연일 뿐이라면 역시 개입이 불가능하다. 지도를 가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명을 따라 가되 매순간 다른 걸음을 연출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운명론은 비전 탐구가 된다. 사주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인생의 길을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앎’이다. 아는 만큼 걷고, 걷는 만큼 열린다. 신비와 미신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길 또한 거기에 있다.
고미숙 고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