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난 지하 유독성자재 가득… 소화기 몇대뿐
▲동영상=경복궁 인근 화재, 사망자 4명으로 늘어...
그는 출구 쪽으로 내달리는 동료들을 쫓아가려 했지만 칠흑 같은 연기가 눈앞을 덮쳤다. 숨을 쉴수록 목구멍이 좁아지는 고통 때문에 호흡을 멈추고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평소엔 1분도 안 걸리는 거리였지만 5분이 지나도록 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리에 쥐가 나고 정신이 아득해질 즈음 먼저 대피한 동료들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 부실 안전관리가 빚은 ‘인재(人災)’
13일 오전 11시 23분경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공사 현장에서 난 화재로 4명이 숨지고 2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불은 우레탄을 이용한 방수 단열 작업이 한창이던 지하 3층에서 시작됐다. 우레탄이 불에 타 유독가스가 발생하면서 지하 3층 인부 4명이 질식해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숨졌다. 지하 1, 2층과 지상에서 작업하던 인부들도 아래층에서 올라온 유독가스를 마시며 긴급 대피했다. 당시 지하 1층에 있었던 한 인부는 “폭발음이 연달아 났다”고 전했다.
소방당국은 우레탄 살포 작업 중 생긴 유증기(油蒸氣)에 용접이나 전기 누전 등으로 인한 불꽃이 옮겨붙어 불이 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장의 한 하청업체 관계자는 “지하 3층에 유증기가 가득 차 있었고 전구에서 스파크가 일면서 갑자기 불이 붙은 것 같다”고 전했다. 사망자 빈소에서 만난 인부들은 “지하 2층에 흡연구역이 있어 자주 담배를 피웠다”고 말했다.
화재 당시 공사 현장에는 페인트와 우레탄, 단열재용 스티로폼, 샌드위치 패널 등 불에 타면 유독가스를 내뿜는 자재가 수북했다. 하지만 공사 도중이라 방재시설은 갖춰지지 않은 상태였다. 화재 대비용 스프링클러는 아예 없었다. 공사 현장은 지하 3개 층을 통틀어 3만1000m²(약 9378평)에 이를 정도로 넓었지만 현장에는 소형 소화기 몇 대뿐이었다.
소방 관계자는 “화재에 취약한 자재가 많은 데다 방재 설비도 안 돼 있어 인명피해가 커졌다”고 말했다. 인부들 사이에선 “현 정부 임기 내에 공사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소문이 많았는데 공사기한을 무리하게 맞추려다 안전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불이 났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은 2009년 1월 문화예술인 신년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옛 기무사 터를 미술관으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건립이 추진됐다. GS건설 컨소시엄이 지난해 12월 공사를 시작했으며 내년 2월 건물을 완공해 연말에 개관할 예정이다. 공사비만 1039억 원이 드는 프로젝트다. 지상 3층, 지하 3층 규모로 지어질 미술관은 지상 3층까지 골조공사가 완료된 상태이며 48%의 공정을 보이고 있다. 화재 현장에 보관 중인 작품은 없었고 등록문화재인 기무사령부 본부관 건물도 별다른 영향은 받지 않았다.
검은 연기 뒤덮인 광화문 13일 오전 서울 종로구 소격동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공사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시꺼먼 연기가 광화문 일대를 뒤덮고 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국보 1호 숭례문이 방화 범죄로 불에 탔던 ‘트라우마’ 탓에 서울 시민들이 경복궁 쪽에서 피어오른 연기를 보고 저마다 신고해 경찰과 소방서에 전화가 빗발쳤다.
경찰은 이날 화재 위치가 정확히 파악되기 전 경복궁과 주한 일본대사관 부근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친 것을 보고 한때 긴장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따른 한일 간 긴장 관계가 방화 등의 범죄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우려한 것이었다.
고현국 기자 mck@donga.com
서동일 기자 dong@donga.com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