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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구례 화엄사

입력 | 2012-05-05 03:00:00

국보-보물 가득 품은 명찰… 눈 감으니 옛 석등 불이 환하다




석가탄신일(28일)이 다가온다. 나는 최근 사찰 스케치 여행을 많이 다녔다. 사찰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자연스레 궁금증도 늘어났다. 하지만 많이 알아야 많이 보이는 건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눈을 감아야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해하며 보는 것만큼 마음으로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때로는 오히려 잘 알지 못할 때만 가질 수 있는 신선한 첫 경험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중 하나로 남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런 벅찬 경외감을 전남 구례 화엄사 앞마당에서 느꼈다.

화엄사는 삼국통일 전인 554년에 창건됐다. 인도 승려라는 설이 있는 연기조사라는 승려에 의해 세워졌는데, 그의 모습은 경내 석등을 이고 있는 석상의 모습에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호남 지방 제일의 사찰답게 화엄사에는 많은 부속 건물과 귀중한 유물들이 있다. 그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바로 석등을 향해 올라가는 길이었다.

경내 아래 마당에서 각황전을 향해 가파른 층계를 오른다. 이 짧은, 하지만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는 오르막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지리산을 온종일 올라가던 그 잔잔한 감동이 한 곳에 응축된 듯 설레는 기분을 전해준다. 현존하는 국내 최대 목조건축물이라는 각황전을 배경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거대한 석등이 장엄한 모습으로 시야를 덮친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수록 석등은 점점 커지며 쓰러질 듯 내게 기대 온다. 압도적인 위엄. 그건 초여름 저녁 지리산 한 자락에서 각황전과 석등이 함께 만들어 낸 장엄한 감동이었다고, 나는 지금 감히 떠올린다.

산에는 일찌감치 밤의 어스름이 찾아든다. 나는 텅 빈 각황전 앞을 떠날 줄 모른 채, 넋을 잃고 화엄사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곧 마지막 햇살이 산등을 넘어 사라지고, 난 지그시 눈을 감는다. 커다란 석등에서 잔잔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을 상상한다. 가늘지만 깊은 사유를 가진 빛.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래서 더욱 밝게만 느껴지던 빛이 내 마음을 은은하게 파고든다.

살며시 눈을 뜬다. 어둠이 깔린 화엄사. 초저녁 지리산 너머로 떠오르던 유난히 밝은 별빛. 아직은 서늘한 산속의 미풍. 풍경소리.

그리고 내가 이 생을 살아가는 이유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