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중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
학교폭력의 현실은 정부정책을 조롱하는 듯하다. 2월 초 정부는 국무총리 담화문과 함께 ‘학교폭력 근절 종합대책’을 내놓았다. 최근에는 대통령이 나서 이 문제를 국정 최우선 과제로 삼아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관련 장관들은 돌아가면서 예방이니 대책이니 하며 강연을 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결연히 약속하던 날에도 우리는 귀한 생명 하나를 잃었다. 엊그제는 폭력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길이 막혀 우는 학생과 부모들에 관한 기사를 읽어야 했다.
우리 대책은 왜 이리 무력한가? 피상적으로는 학교 탓으로 보인다. 가해자들을 솎아내라는데 가해자 존재도 파악하지 못하는가 하면, 피해자가 도움을 청하면 믿음이 가도록 민첩하게 처리하라는데 일을 더 그르치기 일쑤라니 말이다. 이래서는 학교나 교사가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런 과오들이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학교를 탓하는 데 열중한 나머지 폭력 문제가 학교 탓만이 아니란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학교폭력 문제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4반세기 전에 이미 심각한 상태였다. 당시에는 일본 ‘이지메’ 현상이 우리나라에 상륙했다고 걱정했다. 어린 목숨도 여럿 잃었다. 교육당국은 물론 대책을 강구한다며 부산을 떨었다. 그래도 사태는 악화됐지 나아지지 않았다. 1998년 한국교육개발원 조사는 초중고교생 56%가 학교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고 보고했다. 급기야 2004년에는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고, 이듬해에는 ‘학교폭력 예방 및 대책 5개년 기본계획’을 수립해 추진했다. 정책 열기는 당시도 오늘날 못지않게 뜨거웠다. 그런데 아직도 폭력 피해자들은 울고 있고 어린 목숨들 역시 잃고 있다.
학교가 본디 무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학교의 수족이 매여 있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에서 학교는 ‘행복이 성적순’이라고 강변해야 한다. 학생들은 남을 헤아려본 경험 없이 학교에 입학한다. ‘맞지 말고 때리라’는 충고까지 듣고 온다. ‘교편(敎鞭) 잡던’ 전통대로 교원들은 때때로 ‘사랑의 매’란 이름으로 학교폭력을 재생산한다. 이런 환경에서 학교가 정부가 요구한다고 갑자기 폭력의 해결사가 될 수 있을까? 이제 우리는 학교폭력이 ‘학교’ 폭력이 아니라 ‘한국’ 폭력임을 인정해야 한다. 당장 성과를 보지 못하더라도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어가야 한다. 조급하고 성마른 정부의 법석은 지난 4반세기 동안 이루어진 것으로 충분하다.
강태중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