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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이장희의 스케치 여행]서울 수유동 국립 4·19 민주묘지

입력 | 2012-04-21 03:00:00

반세기 전 피의 화요일, 그날의 함성 귓전에 쟁쟁




전국을 뜨겁게 달궜던 19대 총선이 끝났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만 19세 이상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당연해 보이는 투표권의 소중함을 우리는 많이 잊은 듯하다. 우리나라의 투표율(54%)은 70%에 이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투표율에 비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최근 북아프리카나 중동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 와중에 수많은 시민들이 쓰러져 갔다는 소식이 들렸다. 문자 그대로 지구 반대편의 먼 나라에서만 일어날 듯한 얘기 같다. 하지만 52년 전 이 땅에서도 민주주의를 외치다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 서울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자락의 국립 4·19민주묘지에 묻혀 있다.

○ 전국에서 180여 명 목숨 잃어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우리나라 헌법 전문(前文)에 명시돼 있는 말이다. 1960년 4월 19일에 일어난 민주혁명은 한국 민주주의의 시작을 알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는 조선시대를 지나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남북의 분단, 제1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시 부정선거로 집권 연장을 꾀하던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 정권은 온 국민이 들고일어난 4월 19일 규탄시위로 막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180여 명이 사망하고, 수천 명이 부상하는 쓰라린 상처가 남았다.

4·19묘지를 찾았다. 그동안 서울에 살면서도 한 번도 와보지 못한 나의 무심함을 책망하며, 스케치북을 챙겨 들었다. 봄의 길목에 들어선 4월의 햇살은 사랑스럽고 부드러웠다. 정문을 들어서자 넓게 펼쳐진 광장에 마음이 트였다가 이내 중앙의 기념탑을 보며 차분해졌다. 광장과 묘역 공간은 층계와 상징문을 경계로 구분 지어져 있었다. 가족 단위로 찾아온 아이들의 웃음이 아래 광장을 채우고 있었다.

중앙에 우뚝 선 기념탑 뒤로는 하얀 묘비들이 나란했다. 그리고 묘비들 너머 층계 위로 한옥 양식의 유영(遺影·고인의 초상이나 사진)봉안소가 있었다. 수형이 예쁜 백송 두 그루가 양옆을 지키고 있는 봉안소에 들어섰다. 당시 희생자들의 흑백 유영이 참배객을 맞았다. 그 어린 모습, 선명한 눈들을 바라보며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이고 묵념으로 답했다.

○ 4월, 접동새의 울음소리

봉안소를 나와 탑과 묘지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앉아 스케치를 했다. 그러다 묘비 사이를 천천히 걷고 있던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당시 혁명에 참여했다가 다리를 다친 국가유공자였다. 종종 죽은 친구들의 묘를 찾는다고 했다. 그에게 당시 이야기들을 듣는 동안 놀라움과 안타까움에 마음이 아려왔다. 많은 이들이 봄꽃의 아름다움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에게는 아픔이 찾아온다는 사실에 숙연해졌다.

“언젠가 저도 죽으면 이곳에 묻힌답니다.” 그는 빈 곳을 가리키며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그 봄날, 젊은 그가 내달렸을, 내겐 생경한 당시의 서울 거리를 생각했다. 그의 뒷모습은 작아 보였지만 결코 쓸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때 기념탑 주변을 뛰어다니다가 선생님에게 붙들려 훈계를 듣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은 그 시절의 이야기와 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를 아이들에게 설명하며 훈계를 했다. 나는 그림을 마무리하는 와중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묘 하나마다 꽂혀 있던 꽃들과 태극기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봤다.

‘피의 화요일’이라 불리는 그날.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거리에 나온 초등학생과 중고교생 등 많은 시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 당시 사상자들의 평균 나이는 21세였다. 52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살아 있다면, 손자 손녀의 재롱에 미소 짓는 노인이 되어 있으리라. 우리는 오늘날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결코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란 점을 상기해야 한다.

북한산 너머로 하루의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강렬한 빛은 소리 없이 기념탑과 묘비들을 어루만졌다. 나는 눈이 부셔 손을 들어 햇살을 가린 채 기념탑을 올려다 보아야 했다. 중앙에 써 있는 글이 보였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은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되살아 피어나리라.


문득 그 접동새(두견새)의 울음소리가, 그 청명한 울음이 간절히 듣고 싶어졌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