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놀다보니 알겠더라,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임을”
13년 만에 국내 무대로 돌아온 넥센 김병현은 밝고 솔직했다. 자신만을 생각하는 예전의 ‘악동’이 아니었다. 그는 “넥센의 일원으로 동료들과 야구를 하며 소통하는 게 즐겁다”고 했다. 아내와 아이를 책임지는 가장답게 멋진 강속구로 부활하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 오해 1=김병현은 ‘악동’이다?
그래. 나는 김병현이다. 한때는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게 두려웠다. 주위에선 나를 두고 ‘4차원’이라거나 ‘언론 기피증’이라고 불렀지. 그럴수록 나는 더 꼭꼭 숨었다. 사실은 내 야구가 안 돼서 그랬어. 스무 살 때인 1999년 성균관대를 다니다 미국 프로야구 애리조나에 입단한 탓에 사회를 몰라도 너무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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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젠 아냐. 소속 팀이 있고 소중한 가족이 있으니까. 팀 동료와 함께 뛰고 대화하는 게 즐거워졌어. 아내와 아이를 책임지는 가장이라는 게 행복해. 아내와 로맨틱코미디 영화를 보다가 함께 눈물을 흘리며 가슴속 응어리가 풀렸어. 아이와 함께 놀면서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임을 깨달았지.
○ 오해 2=일본 프로야구에서 실패?
지난해 라쿠텐에 입단할 때 신인 연봉(1200만 엔·약 1억6900만 원)을 주겠다고 했을 때 그대로 받았어. 화려한 부활을 꿈꾼 게 아니야. 몸을 만드는 게 우선이었어. 7월까지 직구가 최고 시속 148km까지 나왔고 평균자책도 2점대로 괜찮았지. 하지만 일본의 야구문화에 적응하기 어려웠어. 그동안 던져온 싱커(직구처럼 날아오다 타자 몸쪽으로 떨어지는 공)가 있는데 자기네들 싱커를 배우라고 하더군. 일본은 만화가 발달해서인지 마구(魔球) 같은 싱커를 원하더라. 유니폼을 입고 2군에서 뛰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
○ 오해 3=WBC 여권 분실 사건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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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해 4=관중을 향해 욕한 까닭은?
2003년 보스턴 시절에 선발로 던지다 마무리로 보직이 바뀌었어. 감독은 왼손 타자만 나오면 나 대신 왼손 투수로 바꿨어. 오클랜드와의 플레이오프 때도 내가 투아웃을 잡았는데 투수를 바꾸더군. 바뀐 투수가 실점해 경기에서 졌지. 그리고 홈으로 돌아왔는데 내 소개를 할 때 일부 관중이 야유를 했어. 솔직히 화가 났어. 무심코 미국 사람들이 장난하듯이 중지를 들었는데 그 장면이 대형 전광판에 나온 거야.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많이 혼났어. 욕을 한 건 분명 내 잘못이야. 하지만 내가 끝까지 책임졌던 경기로 비판받았다면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 거야.
○ 오해 5=월드시리즈 홈런 악몽에 굴복?
난 항상 ‘홈런을 맞으면 다음에 막으면 된다’고 생각했어. 2001년 뉴욕 양키스와의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 9회 스콧 브로셔스에게 홈런을 맞고 주저앉은 건 팀원들에게 미안했기 때문이야. 그때 애리조나엔 노장 선수가 많았어. 특히 마이크 모건(53·2002년 은퇴)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인 1978년부터 메이저리그에서 뛴 선수였어. 나랑 친했고 김치도 즐겼지. 그런 그가 “이번엔 월드시리즈 반지를 받는구나”라고 말하던 모습이 떠올라 주저앉아 버린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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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한 야구가 정말 재밌어. 김시진 감독님과 정민태 코치님에게서 중심 이동 등 조언을 받으며 과거의 감각을 되찾고 있어. 투구 폼도 메이저리그 시절에는 중간동작 없이 바로 공을 던졌는데 지금은 글러브를 한 번 치고 던져. 떨어진 유연성과 근력을 보완하기 위해서지. 한현희 등 멋진 후배들을 보면 언젠가 지도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비록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 고향으로 왔지만 후회는 없어. 마운드 위의 김병현에게 이렇게 말하곤 해. “똑바로 던져”라고. 난 나니까.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윤승옥 채널A 기자 touch @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