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 프랑스 파리에서 인상파 전람회가 처음 열렸다. 거기 걸린 클로드 모네의 그림 ‘인상, 해돋이’는 비평가 루이 르로이 눈에 영 못마땅했다. 항구에서 해가 막 떠오르는 순간을 그렸는데 당시 화단의 대세인 고전적이고 정제된 회화와는 사뭇 달랐다. 대상 자체의 정확한 묘사가 아니라 변화무쌍한 자연에 대한 주관적 느낌을,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과 대기의 흐름을 거칠고 대담한 붓질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훗날 그는 글에서 “아무렇게나 만든 벽지도 이보다는 더 섬세할 것”이라고 비평했고, 풍경이 아니라 개인적 인상을 그렸다는 이유로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 참여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불러야겠다”고 조롱했다. 그의 야무진 발언에서 오늘날 전 세계에 두루 퍼져 사랑받는 미술운동의 이름이 태어난 것이다.
반대론자가 멋진 이름 붙여준 격 과학의 빅뱅이론도 미술의 인상파처럼 혹독한 비평에서 탄생한 이름이다. 러시아 태생의 이론물리학자 조지 가모프는 태초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우주가 생겨났다는 이론을 1940년대에 내세웠고 그 반대편에 섰던 영국 학자 프레드 호일은 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으며 항상 정적이고 영원하다는 ‘정상 우주론’을 주장했다. 방송프로그램에서 호일은 “우주의 모든 것이 어느 한순간 ‘빵’ 하고 대폭발을 일으켜 시작되었단 말이냐”고 비웃으며 ‘빅뱅’이란 용어를 처음 썼다. 한데 그 조롱의 의미는 점차 사라지고 호일은 라이벌의 이론에 멋진 이름을 지어준 사람으로서 이름을 남기게 됐다.
자기를 비판하는 반대파로부터 본질을 꿰뚫는 근사한 이름을 부여받은 이야기가 떠오르는 것은 4·11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벌이는 소모적인 네거티브 전략을 보면서다. ‘인상파’와 ‘빅뱅이론’의 명명 과정은, 누군가를 비판하고 나설 때는 적어도 자신이 반대하고 폄훼하는 것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임을 보여준 사례들이다. 이에 비하면 2012년의 한국 사회는 원한과 증오의 감정을 노출하는 데 가장 치열하고, 상대의 흠집과 약점을 감정적으로 공격하는 데 온통 정신이 팔려있는 것 같다. 사리분별 시시비비를 따져보기보다는 내 마음에 안 드는 대상에 삿대질하는 일로 빠듯한 일상을 채워가고 있다. 적과 동지의 이분법, 선과 악의 단순논리로 표를 구걸하는 낯 뜨거운 막장 전략은 그래서 여전히 횡행한다. 같은 편끼리의 무조건적 동조보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예리한 비판적 관점이 때로는 더 유익할 때가 있다는 깨우침을 유권자로서 요구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주문일까.
‘바야흐로 선거가 임박하고 딱딱한 벽들이 웃기 시작한다./후보자들의 미소로 치장한 이즈음의 벽들은/바닥처럼 공손하다./벽이 손을 내밀어 바닥에게 악수를 청한다./그들 앞에서 바닥은 오랜만에/허리를 세워 벽처럼 거만하게 웃어본다./대부분의 몸이 허리인 바닥으로.’(김종미 ‘그들은 나를 지지한다’)
비판하려면 핵심부터 먼저 파악을 뉴질랜드의 나라 새인 키위는 원래 잘 날아다녔으나 지금은 나는 능력을 잃었다고 한다. 천적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결국 날개가 퇴화했고 지금은 땅 위로 걸어 다니며 먹이를 찾는다. 뭘 알고 비판하는 제대로 된 라이벌이나 천적도 진정한 친구만큼이나 필요한 셈인가. 근대사회가 되면서 근친결혼을 피하게 된 것은 우생학적으로 바람직해서라는 설이 있다. 이 나라는 과연 씨족사회나 부족국가에서 정신적으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근대의 문물인 투표 때만 되면 한번 따져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소통을 위한 전자기기는 진화했지만 늘 소통의 부재로 갈등을 겪는 세상에 찾아온 눈부신 봄날, 투표소로 흔쾌하게 달려가야 할 텐데 마음은 영 무겁다. 나만 그런가.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와르르 태어나/잠시 서로 어리둥절해하네/4월 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오규원 ‘4월과 아침’)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