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에 대항하기 위해 10만의 대군을 키워야 한다는 율곡(栗谷) 이이(1536~1584)의 '십만 양병(十萬養兵)설'은 왜적이 아니라 여진족을 막기 위한 방책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민덕기 청주대 교수는 오는 10일 한일관계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할 연구논문 '이율곡의 십만 양병설에 대한 재검토'에서 이같이 주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민 교수는 "십만 양병설은 임진왜란과 연결할 수 없다"면서 이이가 실제로 십만양병설을 제기했다면 그것은 남쪽의 왜적이 아니라 북쪽의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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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가 병조판서로 있던 1583년 당시 일본은 전국 통일을 눈앞에 뒀던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한 직후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직 정국을 장악하지 못했던 때였다.
반면 조선의 동북방 지역에서는 여진족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 위기가 고조됐다.
당시 조선 조정은 각 도에서 정예 병사를 뽑아 동북방 지역에 파견했으며, 선조가 사찰의 종까지 거둬들여 무기인 총통을 만들라고 지시했을 정도로 니탕개의 난은 조선 조정에 큰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
민 교수는 "당시 국방차원에서 주로 논의된 지역은 '남왜(南倭·남쪽 왜적)'가 아니라 동북방의 '북로(北虜·북쪽 오랑캐)'였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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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당시 일본은 "누가 주도권을 쥘 수 있을지 일본 내에서조차 오리무중이었던 때였다"면서 "그런 때 율곡이 히데요시의 침략을 예상했다면 하느님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민 교수는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쓰나미는 1580년대의 니탕개의 난으로 촉발된 동북방의 제반문제를 삼켜버렸다"면서 "율곡이 그토록 고심하던 동북방 문제는 임진왜란의 발발로 대일용 십만 양병설이 되어버렸다"고 주장했다.
민 교수는 십만 양병설이 어떻게 '국민적 상식'이 되었는지, 또 십만 양병설을 부정하는 일부 학계의 주장과 이에 대한 반론도 상세하게 소개했다.
디지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