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연극속에 흐르는 건 ‘복수의 피’냐 ‘치유의 피’냐

입력 | 2012-02-28 03:00:00

■ 연극 ‘고곤의 선물’ ★★★★




연극 ‘고곤의 선물’. 호소력 짙은 화술과 유연한 연기로 극의 무게중심을 잡아준 헬렌 역의 김소희 씨(왼쪽)와 천재성보다는 인간미에 초점을 맞춘 에드워드 담슨 역으로 더 차분하게 극의 이해를 도운 정원중 씨가 주역을 맡았다. 극단 실험극장 제공

니체는 그의 첫 작품 ‘비극의 탄생’에서 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통타했다. 질서와 조화로 대표되는 아폴론적 영감뿐 아니라 파괴와 광기로 대변되는 디오니소스적 영감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에쿠우스’와 ‘아마데우스’의 극작가 피터 셰퍼 원작의 ‘고곤의 선물’(구태환 연출)은 연극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팽팽한 길항관계를 파고든다. 주요 등장인물은 셋이다. 영국의 천재 극작가 에드워드 담슨(정원중), 그의 아내 헬렌(김소희) 그리고 담슨의 배다른 자식 필립(이동준)이다.

담슨이 은둔처였던 그리스 티라 섬(산토리니 섬으로 더 유명한 곳)의 별장 절벽 아래로 투신해 숨진 뒤 문학교수가 된 필립이 찾아온다. 존경하는 생부에 대한 전기를 쓰겠다는 필립에게 헬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전기를 완성한다는 맹세를 받아낸 뒤 담슨의 숨겨진 진면목을 공개한다.

저주받은 자식(갓 뎀 선)이란 의미가 담긴 담슨은 디오니소스적 영감의 지배를 받는 극작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50편의 희곡을 쓴다. 그러나 모두 클라이맥스 장면만 있을 뿐 미완성이다. 디오니소스적 열정과 도취의 산물이다. 그에게 연극은 현실에서 유예되거나 은폐된 정의를 피의 복수로 실현하는 것이며 ‘그리스적인 것’은 곧 피의 복수로 세상을 정화하는 것이다. “극작가는 극단적으로 되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그의 말 역시 디오니소스적 광기의 산물이다.

반면 고대 그리스어를 전공한 헬렌은 아폴론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다. 그는 케임브리지대 교수로 평화주의자인 아버지가 ‘지는 해’라면 매사에 도발적인 담슨이 ‘뜨는 해’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담슨을 택한다. 또한 극단적 성격의 담슨이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균형감 있는 희곡을 완성할 수 있도록 지혜를 빌려준다.

담슨은 이런 관계를 그리스신화 속 페르세우스와 아테나 여신에 비견한다. 페르세우스는 아테나 여신의 도움을 받아 고곤의 세 자매 중 막내인 메두사의 목을 벤 영웅이다. 연극 제목에 등장하는 고곤은 곧 그 얼굴을 바라본 사람을 돌로 변하게 만드는 메두사를 뜻한다.

담슨의 예술적 목표는 관객의 오금을 저리게 만드는 정의의 실현으로서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전통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메두사의 머리를 베어 장식한 아테나 여신의 방패를 들어올리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극작가로서 담슨의 눈부신 성공은 오히려 둘의 관계에 균열을 낳는다. 디오니소스의 광기가 아폴론이 쳐놓은 결계(結界)를 뚫고 날뛴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의 머리를 아테나에게 바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그 머리를 들고 다니며 직접 광기 어린 복수에 나서다 비극적 파국을 맞게 된 것이다.

‘고곤의 선물’은 곧 연극을 상징한다. 고곤에게 죽음을 부르는 피와 치유의 힘을 지닌 피가 흐르듯 연극 역시 타락한 세상을 정화하려는 복수의 피와 그런 세상에서 상처받은 이들을 구원하는 치유의 피다. 전자가 디오니소스적 피라면 후자는 아폴론적 피(아폴론이 의학의 신임을 기억하라)다. 담슨의 비극은 둘 중에서 오직 전자만 취하려 한 점이다. 니체 역시 이를 강조했다. 고대 그리스의 기적은 결코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승리가 아니다.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적 요소의 균형을 통해 이룩됐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2008∼2009년 국내 초연된 이 작품은 당시 담슨 역을 맡은 정동환의 카리스마 넘치는 화술로 인해 ‘담슨의 고곤’이라 할 만했다. 이번 공연은 상대적으로 헬렌 역을 맡은 김소희의 화술과 존재감이 더 뚜렷해 ‘헬렌의 고곤’이라 할 만하다. 담슨 역을 맡은 정원중 씨는 ‘말의 연기’보다는 ‘몸의 연기’에서 빛을 발한다. 오열하는 헬렌을 앞에 두고 복수의 실현을 자축하는 ‘발 구르기 춤’을 출 때 강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권재현 기자confetti@donga.com        

:i: 극단 실험극장과 명동예술극장이 공동 제작했다. 3월 11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2만∼5만원. 02-889-3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