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원 논설위원
가상 시나리오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브레진스키는 2025년 미국의 쇠락으로 안보 불안에 직면한 한국의 선택지로 중국을 상정했다. 미국이 한국을 지켜줄 수 있다는 확신이 없어질 경우 한국은 중국이 수행하게 될 동북아지역 안정 보장자로서의 역할에 의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지 않을 경우 한국은 자력으로 정치, 군사적 위협을 이겨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직면할 수 있다고 봤다. 한미동맹이 유효하지 않을 상황에 대비하라는 경고다.
2010년과 2011년 두 차례 미국 워싱턴에서 브레진스키를 만난 적이 있다. 깐깐한 인상에 창백해 보이는 브레진스키는 1970년대 중후반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해 한국과 악연(惡緣)이 있다. 천문학적 군비를 투입한 베트남전 패배 후 만성적 경기침체(stagnation)에 시달리던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한반도 정세에 대한 숙려(熟慮) 없이 ‘묻지 마’ 철군을 강행하려 했다. ‘두 개의 한국’에서 돈 오버도퍼는 “주한미군사령관과 국방장관, 국무장관 등 내각이 미군 철수를 반대했지만 브레진스키는 카터 편에 서서 철저히 그를 옹호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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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진스키는 미국의 대(對)아시아 정책에 대해 “19세기 영국이 취했던 균형자(balancer) 또는 조정자(conciliator)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이 새로운 패권국으로 등장하는 것이 세력균형이나 지역안정에 유리하지 않을 테니 한국이나 일본과 관계를 유지·강화하는 방식으로 중국을 견제하자는 뜻이다. 이 구도대로 움직인다면 중국은 한국이 미국의 중국 봉쇄망에 참여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낄 것이고, 압도적인 경제·통상관계를 무기로 미국과 중국 중 일방을 택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균형자를 자임하며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려다가 한미동맹을 위기에 빠뜨렸다. 이명박 정부는 한미동맹을 복원했지만 중국과의 신뢰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에 못 미친다.
폴 케네디는 ‘강대국의 흥망성쇠’에서 힘의 공백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패권국을 탄생시키고 새판 짜기로 이어진다고 했다. 미국이 쇠퇴한다면 지리적으로 한국과 멀어 영토 야심이 없으면서도 한반도에 자국의 사활적 국가이익이 있고 그 이익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지켜낼 나라를 찾아 새 동맹을 맺어야 할지도 모른다. 중견국가로서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협력을 증진시키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확대하는 데 국력을 모을 필요가 있다. 민족사의 전환점이 될 통일도 국제사회의 지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