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윽박지르기로는 상생 어려워… 제도 먼저 갖추자”
동아일보는 지난달 16일부터 30일까지 중소·중견기업 대표 10인을 심층 인터뷰했다. 정부가 최근 추진하는 대·중소기업 상생정책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대부분의 인터뷰는 저녁 술자리에서 이뤄졌다. 그들은 “대기업에 부당한 대우를 받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쉽게 말문을 열지 않았다. “우리는 건전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거나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자정을 넘어 술자리가 무르익자 이들은 익명 보도를 전제로 조금씩 대기업과의 악연(惡緣)을 털어놓았다. 인터뷰 중에 이들은 정부 정책 대부분은 현실을 모르는 ‘탁상행정’이라며 분노했고 일부는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중소·중견기업 대표들은 대기업과 하도급 관계를 맺으면서 빈번하게 겪는 문제로 △단가 인하 △기술 탈취 △인력 유출 등 세 가지를 꼽았다. 10명 중 8명의 사장이 이런 일을 겪었다고 했다. 일부 관계 진전을 시사하는 보도가 있었지만 현실은 다르다는 얘기다.
또 다른 소프트웨어업체 사장은 국내 한 대형 포털업체와 거래할 때 발생했던 황당한 ‘기술 탈취’ 사건을 털어놓았다. 그는 “2년 동안 소프트웨어를 공짜로 사용하게 한 뒤 정식으로 유료 계약을 하기로 했다”며 “해당 기업은 약속한 기한이 되자 개발비용에도 한참 못 미치는 금액을 제시했다”고 했다. 1개월가량 지난 뒤 그는 해당 포털사이트에서 자신이 개발한 것과 동일한 서비스를 발견했다. 그는 “나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과장급 직원이 ‘억울하면 고소하라’고 말하더라”며 “돈도 돈이지만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해당 포털사이트는 이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파견한 직원을 빼가기도 했다.
이번 인터뷰에는 중소 시스템통합(SI) 업체 1곳, 모바일 앱 개발사 1곳, 소프트웨어 기업 2곳, 국내 대형 전자회사의 협력업체로 있는 부품회사 4곳, 소재업체 1곳, 장비업체 1곳의 대표가 협조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회사가 공개될 것을 두려워해 매출액조차 밝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의 육성을 담아 대·중소기업 공존을 위한 해법을 제시한다.
정진욱 기자 coolj@donga.com
▼ “단가인하-기술탈취-인력 유출 너무해요” 인터뷰 도중 눈물 보이기도 ▼
동아일보와 인터뷰한 중소·중견기업 사장 10명은 협력업체를 무시하는 대기업의 횡포는 ‘현재 진행형’이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시장 논리를 무시한, 대기업을 윽박지르는 형태의 재벌 정책으로는 결코 대·중소기업 상생을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정교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정부는 현재 대기업 협력업체로 있는 중소기업이 아니라 협력업체를 꿈꾸는 신생기업을 집중 육성해야 하며, 중소기업이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커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성장통’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땅에 떨어진 대기업의 기업가정신을 복원하는 것이 대·중소기업 상생에 큰 도움이 된다고도 했다.
○ “사업 포기할 각오하고 대기업 신고”
F사 사장은 “사업이 망해도 좋다고 결심한 기업이 아니라면 정부에 대기업 관련 불공정행위를 신고할 수 없다”며 “대부분의 대기업 구매 담당자들은 ‘불평 많은’ 중소기업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공유하면서 따돌리기 일쑤”라고 말했다.
삼성 현대 SK 같은 대기업만을 규제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소재업체인 I사 사장은 “국내 기업 생태계는 대기업에서 처음 주문을 받는 1차 하도급 업체에서 2차, 3차, 4차 하도급으로 이어지며 하청에 재하청을 주는 구조”라며 “대기업이 제값을 주고 물건을 사더라도 2차 하도급 업체에서 단가를 후려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장비업체인 J사 사장은 “대기업의 중소기업 지원 정책이 먹이사슬의 맨 끝에 있는 영세 중소기업까지는 못 미친다”며 “먹이사슬 전체의 불공정 행위를 주도면밀하게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좀비 중기는 솎아내고, 성장통은 최소화’
5명의 직원으로 모바일 앱(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B사 사장은 “현재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보다 한 번이라도 대기업과 같이 일해 보는 것을 평생의 소원으로 여기는 중소기업이 더 많다”며 “기술력과 아이디어를 갖고서도 5평짜리 사무실을 얻을 전세 보증금을 못 구해 허덕이는 기업을 먼저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 수준으로 덩치를 키웠더라도 중소기업으로 남으려는 현실도 문제다. 중소기업은 ‘중기 졸업’과 동시에 중기 정책자금 특별세액감면 등 세제(稅制) 및 금융 지원이 단절되고 공공기관 구매에서도 뒷전으로 밀리게 된다. 또 정부사업을 위한 연구개발(R&D) 지원 대상에서 빠지거나, 산업기능요원 같은 인력 지원도 받을 수 없게 된다. 중소기업들은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해 덩치가 일정 수준으로 커지면 법인을 잘게 쪼개는 등 각종 편법을 동원해 중소기업으로 남기를 원한다.
실제로 중소기업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제조업종 대기업의 수는 2006년 671개에서 2009년 596개로 매년 2∼4%씩 감소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전자 관련 대기업 협력사인 G사 사장은 “중소기업이 덩치가 커지더라도 당장 대기업 수준의 마케팅 활동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3년 정도는 한시적으로 법인세 인하 혜택을 유지하는 등 ‘연착륙’을 도울 수 있는 정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소 시스템통합(SI)업체인 A사 사장은 “이익공유제처럼 이상주의적이고 거대담론 같은 정책을 펼칠 게 아니라, 개별 프로젝트 단위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공동 R&D를 지원하는 등 미시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며 “한두 개 규제로 복잡하게 얽힌 대·중기 상생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편의주의적인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 대·중기 양극화…한국사회 지속성을 흔든다
부품 제조업체인 H사 사장은 “정부가 지난해부터 동반성장위원회를 구성해 중소기업을 편드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기업 현장에선 상생의 진정성을 느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회사를 자식에게 넘기는 것도 모자라 그룹 계열사 일감을 몰아주고 빵집을 차려주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며 “대기업의 이 같은 행태는 결국 중소기업의 사기 저하로 이어지고, 우수한 젊은이들이 중기를 기피하는 악순환만 초래할 뿐”이라고 했다. C사 사장은 “법을 지키지 않아도 한국에서 대기업은 망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상황에서 누가 중소기업으로 오겠는가”라며 한숨을 쉬었다.
성신여대 경제학과 강석훈 교수는 “현재 한국의 상황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위상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며 “대기업이 존경받지 못하고 반감이 커지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한국사회 자체의 지속 가능성도 크게 흔들릴 것”이라고 말했다. 아주대 경제학과 현진권 교수도 “미국에서는 주식회사를 지칭할 때 공적(公的) 기업이라는 의미에서 ‘퍼블릭 컴퍼니’라고 부른다”며 “회사는 개인 소유이지만 사회적인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뜻으로 한국의 대기업도 변화하는 시대 흐름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진욱 기자 cool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