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엔 햇빛이 아까워, 밤엔 전깃불이 아까워 붓을 든…”갤러리 현대서 ‘한국 추상미술 선구자’ 김환기 회고전
갤러리 현대가 기획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김환기’전은 구상과 추상을 아우르고 서구적 기법으로 동양의 정체성을 그려낸 수화 김환기의 시대별 대표작들을 세련된 전시연출로 선보인 미술관급 전시이다. 하나 하나 점을 찍어 완성한 말년의 대작에서는 빛과 색채의 매혹적 아름다움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위), 피난열차(1951년) 달과매화와새(1959년) 무제 V-66(1966년) 10만 개의 점(1973년) 김환기 김향안 부부(아래 왼쪽부터)
2010년 박수근, 2011년 장욱진에 이어 한국 미술에 큰 발자취를 남긴 작가를 세 번째로 재조명한 전시다. 박명자 대표는 “수화는 뒤늦게 미국에 건너가 신인의 자세로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고, 잠자는 시간만 빼고 작업에 몰두해 3000여 점(유화 1000여 점)을 남기는 등 왕성한 활동으로 ‘한국의 피카소’라 불릴 만하다”며 “미술계에서 평가받는 만큼 국민화가로도 사랑받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6일∼2월 26일. 3000∼5000원. 02-2287-3500
○ 절제와 여백의 구상
수화는 1930년대 도쿄 유학을 다녀왔고, 1956년부터 3년간 프랑스 파리에서 지내다 서울에 돌아온 뒤, 작고할 때까지 11년간 뉴욕에서 작업했다. “나는 우리나라를 떠나 봄으로써 더 많은 우리나라를 알았고 그것을 표현했으며 또 생각했다.” 화가의 말대로 일찍부터 이주의 삶을 선택한 수화의 예술에는 일관되게 자연에 대한 애정과 한국적 감성이 배어 있다.
○ 명상과 사유의 추상
신관에 들어서면 김광섭의 시를 소재로 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년)처럼 점, 선, 면의 순수한 조형요소를 활용한 말년의 대작이 반겨준다. 전시를 함께 둘러보던 수화의 둘째 딸 김금자 씨는 “저토록 무수한 점을 찍느라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며 ‘낮엔 햇빛이 아까워 붓을 안 들 수 없고, 밤엔 밝은 전깃불이 아까워 그림을 안 그릴 수 없다’던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뉴욕 시절 수화는 낯선 땅의 문화를 우리 전통문화의 멋과 융합한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빛과 색채의 미학, 서구 조형언어와 동양의 촉촉한 시정이 조화를 이룬 추상의 세계다. ‘10만 개의 점’ 등 숱한 점으로 구축된 대작들이 한데 어우러진 2층 전시실은 거대한 천체를 보는 듯 웅장한 장관, 찬란한 색과 빛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전시를 기념해 국·영문 도록이 발간되고 평론가 유홍준 씨의 특강(10일 오후 2시)과 전남 신안의 생가 방문(2월 20일) 등 일정도 마련됐다. 변방의 아시아 작가로서 세계 미술의 중심에서 호흡하며 한국적 정서를 보편적 조형언어로 승화시켰던 작가. 서정과 숭고미가 겹겹이 자리한 그의 작업은 우리가 알고 있는 ‘위대한 화가’를 넘어, 앞으로 새롭게 발견해야 할 ‘위대한 아티스트’로서 그의 존재를 일깨운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