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나무는 치열하다

입력 | 2011-10-08 03:00:00


가을- 이충길, 그림 제공 포털아트

어느 날 아주 우연히, 대학 강단에서 사학을 가르치는 한 역사학자가 자신이 근무하는 교정의 나무가 몇 그루인가 궁금해서 헤아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그루 한 그루 헤아려 나가는 동안 역사학자는 모든 나무가 다른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어 비로소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두 온전한 존재라는 사실에 눈을 뜬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의 인생은 나무를 모르고 살았던 40년과 나무를 알게 된 40년 이후의 삶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나무로부터 그가 가장 크게 배운 것은 치열한 이기주의라고 합니다. 나뭇가지가 그늘을 만드는 게 처음부터 사람을 위함이 아니고, 가을에 단풍이 드는 게 처음부터 사람의 감상을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치열하게 진행된 나무의 이기주의적 생명 활동이 궁극에 이르러 자연의 전체적 생명 활동에 이바지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요컨대 온전한 나를 만드는 것이 결과적으로 타인을 위한 일이 된다는 것, 치열하게 살아야만 타인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 그것으로부터 그는 치열하지 못한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냈습니다. 치열하게 살지 못한다면 남을 위하거나 남을 탓하는 게 모두 무의미하다는 전언입니다.

나무의 생명력은 인간의 생명력과 매우 흡사합니다. 인간 세상의 4계절에 나무처럼 정확하게 반응하는 것도 드물기 때문입니다. 봄이면 파릇파릇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오고 그것이 여름이면 무성한 우듬지를 이뤄 녹음을 과시하고 가을이면 열매 맺고 잎을 떨어뜨려 헐벗은 몸으로 돌아갑니다. 겨울 내내 나뭇잎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혹독한 겨울나기를 하는 나무의 형상은 주검과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한살이를 위한 인고의 시간, 지난 한살이의 생명 활동을 다가올 한살이에 반영하는 과정입니다.

1982년 일본의 식물학자가 2000년가량 된 무덤에서 발견한 종자 미상의 씨앗을 화분에 심었다고 합니다. 2000년 동안 지하의 어둠 속에 파묻혀 있던 그 씨앗이 놀랍게도 1983년 싹을 틔웠다고 합니다. 2000년 뒤에 부활한 그것은 목련이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3년 그것은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자연의 법칙성과 생명의 진리를 생각하게 만드는 그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세상에 만연한 생명 경시 풍조와 한없이 나약해진 삶의 자세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여행, 혹은 여행처럼’이라는 책에서 읽은 한 역사학자의 나무 이야기와 일본의 목련 이야기는 신경림 시인의 ‘나무’로 이어져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더욱 깊이 느끼게 합니다. 나무의 치열한 이기주의, 그리고 2000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꽃을 피우는 생명의 초월성을 되새기며 삶의 자세를 다시 한 번 가다듬어야겠습니다.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제 치레하느라 오히려/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보다 실하고/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박상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