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天下는 ‘지금 천하의 제후들은’이다. 莫能相尙은 어느 누구도 남보다 우위에 나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尙은 넘어선다, 뛰어넘는다는 말이다. 無他는 다른 이유가 없다는 말로, 곧 그 이유는 뒤에 말하는 이것뿐이라는 뜻이다. 好臣其所敎는 제후가 자신이 가르쳐주고 시켜야 하는 그런 보잘것없는 인간을 신하로 삼기를 좋아한다는 말이다. 好의 목적어가 臣其所敎이고, 臣의 목적어가 다시 其所敎이며, 其는 생략되어 있는 말인 ‘제후’를 가리킨다. 好臣其所受敎에서도 好의 목적어는 臣其所受敎이고, 臣의 목적어가 다시 其所受敎이며, 其는 ‘제후’를 가리킨다. 이 두 구절의 중요한 차이는 所敎와 所受敎에 담겨 있다. 所敎는 가르쳐 주어야 하는 바, 所受敎는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바라는 뜻이다.
조선 선조 때 裵龍吉(배용길)은 ‘六條疏(육조소)’에서 군주가 재상을 택할 때 가르칠(시킬) 수 있는 사람만 구하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구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취하고 두려워할 수 있는 사람은 취하지 않는 상황을 우려했다. 오늘날 여러 단체의 지도자들도 可敎可愛(가교가애)의 사람만 가까이 두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所受敎所可畏(소수교소가외)의 사람을 가까이 해야 그 단체가 발전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