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비의 쌍곡선 간직한 한국 현대사의 푯말이여
문득 다리 위로 우뚝 솟은 카페가 보였다. 매일 지나면서 한 번 가봐야지 벼르던 차였다. 마침 다음 약속까지 여유도 있고 해서 급하게 벨을 누르고 버스에서 내렸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거대한 물고기 떼 행렬에서 홀로 이탈한 듯한 기분은 잠시, 계단을 올라 들어선 카페에는 오후의 나른함과 한적함이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창으로 카페가 있는 한강대교와 노들섬, 그리고 한강철교 너머 여의도까지 한눈에 들어왔다. 마음에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항상 갖고 다니는 작은 스케치북을 꺼내 들었다.
한강은 언제부터 이렇게 역동적으로 흘렀을까. 해외 어느 나라의 대도시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수량의 강물. 한강은 도시 발전의 축복이자 장애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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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사람이 건널 수 있는 다리가 놓인 건 1917년이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강대교의 전신이다. 한강철교를 만들고 남은 자재를 활용해 만들어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일부분이 유실되기까지 해서 다시금 확장 보수를 했다. 이후 여러 번의 확장과 재건축을 거쳤고, 1981년 확장 공사로 현재의 쌍둥이 교량이 됐다.(서울지명사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9년 참조)
6·25전쟁 때는 국군이 북한군의 남하를 막고자 한강철교를 예고 없이 폭파했다. 그 바람에 당시 다리를 건너던 수백 명의 피란민이 희생됐다. 서울 인구의 80%와 2개 사단의 군 병력도 강을 건너지 못한 채 고립됐다.
이토록 애환 많은 한강대교는 일제강점기부터 서울의 대표적인 나들이 명소로 인기가 많았다. 그 옛날에 야간조명까지 밝혀 놓을 정도였다. 한강대교는 동시에 자살 명소로 악명이 높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촌대기(一寸待己·잠깐만 참으시오)’란 팻말을 세워 놓기까지 했다. 자살과 관련된 오명은 최근까지도 이어졌다. 이제는 아치 트러스에 기름을 바르거나 롤러 달린 판을 설치해 다리 아치 위로 올라가는 행위 자체를 원천 차단한 상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간만에 노들섬을 한 바퀴 거닐었다. 이 작은 섬을 일주하는 기분은 어린왕자가 사는 작은 혹성 B612를 걷는 듯 단조롭기만 했다. 예전 노들섬은 지금처럼 시멘트로 각지게 마무리한 ‘옹벽 요새’가 아니었다. 하얀 백사장이 펼쳐진 아름다운 모래섬이었다. 물이 적은 갈수기에는 섬에서 북쪽 용산 강변까지 하얗게 모래밭이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그 규모가 여의도보다 컸다고 전해온다. 백사장 위로 거대하게 펼쳐진 갈대숲의 절경은 노을이 질 때면 장관을 이뤘다. 섬에는 물맛이 빼어난 우물까지 있어 물을 길어 궁궐에 바치기도 했었다고 한다. 상전벽해의 무상함이 이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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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끝에 앉아 멀리 한강철교를 바라봤다. 서울에서 이토록 탁 트인 전경을 바라 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그 시원함에 나도 모르게 옛날 모래밭 위의 피서객이 된 듯 한동안 머물러 있었다. 문득 멀리서 기차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참, 약속시간! 시계를 보며 부리나케 바지를 털고 일어나 노들섬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이장희 일러스트레이터 www.ttha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