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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최고의 수술]故 김수환 추기경 각막이식 집도 주천기 교수

입력 | 2011-05-23 03:00:00

“추기경 안구기증에 감동… 의료봉사 눈떴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환자를 돌보는 의사. 수술실에서 그들은 생명윤리와 의료수칙에 충실해야 한다. 흰 가운을 벗고 나서야 감정을 추스를 수 있다. 의사들로부터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와 진료 이야기를 듣는 ‘내 생애 최고의 수술’ 시리즈를 시작한다. 첫 회에는 고 김수환 추기경의 각막 이식 수술을 집도한 주천기 서울성모병원 안센터장을 만났다.》

서울성모병원 안센터 입구에 걸린 고 김수환 추기경의 친필 액자. 이 병원의 주천기 안센터장은 늘 앞만 보고 달렸고, 나눔이란 여유가 있을 때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구를 기증한 추기경의 수술을 맡은 뒤 자신의 인생을 다시 돌아보면서 인생관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메스.”

주천기 서울성모병원 안센터장(55)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2009년 2월 16일. 그날 수술대에는 방금 선종한 고 김수환 추기경이 누워 있었다. 분초를 다투는 수술에서 떨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메스를 잡은 주 교수의 손이 여느 때처럼 빨리 움직였다.

1시간 정도 걸리는 수술이 끝났다. 적출된 안구는 신속하게 얼음주머니에 담겼다. 이식 가능한 각막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 검사를 의뢰했다. 각막 내피의 수가 2000개 이하이면 이식을 할 수 없다. 지난달 19일 서울성모병원 안센터에서 만난 주 교수는 “20년 동안 매일 8∼10건 안과 수술을 했지만 그때만큼 긴장한 적은 없었다”며 당시의 수술을 회상했다.

○ 장기 기증 서약 못 지킬 뻔

김 추기경은 안과 진료를 담당해온 주 교수에게 “안구 기증을 해야 하니 눈을 잘 관리해 달라”고 늘 얘기해 왔다. 김 추기경은 1990년 이미 장기 기증 서약을 한 바 있다. 안구 적출은 했지만 과거 백내장 수술을 받은 데다 노안이라 이식이 가능할지 걱정이 앞섰다. 복도에 줄 서 있는 기자들도 떠올랐다.

“사실 검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몇 시간이 수술 때보다 더 떨렸습니다. 이식이 불가능하면 연구용으로 기증합니다. 김 추기경을 본받아 장기 기증 서약자가 늘어나는 상태에서 만약 적출만 하고 이식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될지…. 이런 분위기가 식지 않을까, 시신만 훼손했다고 천주교 신자들이 반발하지는 않을까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릅니다.”

주 교수는 검사 결과가 담긴 서류를 받자 허겁지겁 봉투를 뜯었다. “휴.”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바로 이식을 받을 대상자 선정에 들어갔고 다음 날 두 명의 환자가 새 빛을 얻었다.

○ 수술 후 인생관도 달라져

주 교수는 김 추기경 수술 이전과 이후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고백했다.

김 추기경이 돌아가신 뒤 명동성당 앞에는 40만 명의 추모객이 줄을 섰다. 평생 보통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지도자였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그때 실감했다. 김 추기경이 떠나며 남긴 것은 묵주 1개, 안구 2개뿐이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이 죽고 나면 덧없더군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후회 없을까. 제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됐습니다.”

주 교수는 서울시내 최고 병원에서 안센터장을 맡고 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다. 2008년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총리상, 2010년 대한의사협회 한미자랑스러운의사상을 차례로 수상했다. 가히 안과 분야의 1인자라 할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1등은 아니었다. 목표로 했던 고등학교, 대학에 가지 못했다. 서울본원이 아닌 지방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했고 1994년 2년간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대기발령 상태로 지낸 적도 있다. 주 교수는 “늘 앞만 보고 달려왔다. 1등이 아니었기에 1등을 해야 한다는 욕심이 컸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날 수술 이후 인생의 가치관이 달라졌다.

“나눔이란 여유가 생겼을 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어요. 나이 들어 은퇴하면 의료봉사를 해 볼까 정도였죠. 진료도 최고, 연구실적도 최고, 제자 교육도 최고…. 그저 최고의 의사가 되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어요.”

그런 그가 2009년 11월 케냐 나이로비로 향한다. 꼬박 18시간 비행기를 탔다.

○ 세상을 밝히는 의사로 거듭나기

국제구호단체인 ‘월드쉐어’로부터 어린이 실명 예방을 위한 의료봉사활동을 제안받았다. 주 교수는 첫 질문이 끝나자마자 선뜻 승낙했다. 김 추기경과 한 약속을 지키고 싶어서였다.

“세상을 밝히는 의사가 되라고 당부하셨어요. 좋은 시설에서 수술하고 좋은 환경에서 가르치는 것만으로 그 약속을 지킨다고 할 수 없잖아요.”

케냐에서는 그나마 시설이 좋다는 ‘케리초병원’으로 갔다. 그래도 한국의 1960, 70년대와 비슷했다. 이곳에서 선천성 백내장을 앓는 케냐 아이들 11명을 수술했다. 국내에서는 고등학생까지 전신마취를 한다. 케냐에서는 일곱 살보다 어린 아이는 전신마취, 그 이상 아이는 부분마취를 한다. 아이들이 고통을 참을 수 있을지 안타까움이 앞섰다. 수술 기구는 알코올을 바른 뒤 불을 붙여 소독했다.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수술 도중 전등이 꺼지기도 수차례.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며칠 뒤 아이들은 가족들 앞에서 붕대를 풀었다. “하늘이 파래요.” “앞에 계신 분이 엄마 맞아요?”

모두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주 교수도 아이들을 한 명씩 꼭 안아 주었다.

주 교수는 해외 의료봉사 이후 저개발국 의사 연수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케냐에서 수술을 보조했던 의사는 6개월간 한국에 와서 연수를 받았다.

“지금도 안센터 입구에는 김 추기경이 직접 쓴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액자를 볼 때마다 세상을 밝히는 의사가 되라는 김 추기경의 말씀을 가슴에 다시 새기곤 합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는 액자를 찬찬히 바라보니 안경 뒤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주 교수의 눈이 떠오른다.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