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EU FTA 비준 낙관했는데…
당초 정부는 한미 FTA와 달리 한-EU FTA의 비준동의안은 비교적 ‘부드럽게’ 국회의 문턱을 넘을 것으로 봤다. 한미와 한-EU FTA의 비준 순서를 놓고 동시 처리와 순차 처리를 저울질했던 정부와 여당이 ‘한-EU FTA의 선(先)비준’ 방침을 정한 것도 상대적으로 수월한 숙제를 먼저 끝내겠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점이든 콤마든 바꾸지 않겠다’던 입장을 번복해 미국과 추가 협상까지 벌인 한미 FTA와 달리 한-EU FTA는 “야당 처지에선 반대할 거리가 너무 없어 고민이 될 것”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뜻밖의 곳에서 발목이 잡혔다. 송기호 통상전문변호사가 실무 차원에서 한-EU FTA의 한글번역본을 살피다가 원산지 규정에서 영문 원본의 ‘50%’가 한글번역본에는 ‘40%’와 ‘20%’로 잘못 번역돼 있는 것을 찾아내 한 인터넷 언론에 기고했기 때문. 정부는 번역 오류 논란이 일기 시작한 첫날, 국회에서 일단 비준을 마치면 추후 EU와의 실무협의를 통해 오류를 고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원본에는 들어가 있지도 않은 문구가 번역본에 들어가 있거나 의역의 정도를 넘어 오역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 포함되는 등 추가 오류가 계속 발견되자 결국 기존의 비준동의안을 철회하고 새 비준동의안을 국회에 다시 제출하는 ‘촌극’을 벌였다. 외교부에 대한 신뢰에 큰 흠집이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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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美 ‘끼워팔기’에 한미 FTA 표류?
한미 FTA는 더 상황이 좋지 않다. 정부는 2007년 한미 FTA 최초 타결 당시 미국에 앞서서 한미 FTA를 비준했다가 미 의회가 비준 절차조차 시작하지 않은 채 갖가지 추가 요구를 해 온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이번엔 미 의회에서의 비준 절차가 먼저 시작되는 것을 보고 우리 국회에서 비준을 시작한다는 방침을 공공연히 밝혀 왔다. 그러나 미 공화당과 민주당 지도부가 한미 FTA와 미-파나마, 미-콜롬비아 FTA를 함께 처리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오며 문제가 꼬이기 시작했다. 미 정부는 노동조건 개선 등 현안이 남아 있는 콜롬비아 파나마와의 FTA에는 소극적인 데 반해 공화당과 민주당의 맥스 보커스 상원 재무위원장 등은 이번 기회에 3개의 FTA를 일괄 타결하겠다며 정치적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다. 이 때문에 미-콜롬비아, 미-파나마 FTA가 완전 타결될 때까지 한미 FTA 비준이 장기 표류할 가능성마저 제기된다.
그러나 일각에선 정부가 성과주의와 실리를 추구하며 비준을 너무 서두르다가 역풍을 맞은 측면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EU FTA는 한미 FTA의 비준을 위한 정치적 고려 때문에 서두르다가 문제를 자초했다”며 “다만 직역, 의역 논란처럼 애매한 문제도 있는 만큼 한-EU FTA를 우선 4월 국회에서 비준하고 타이밍을 잘 계산해 한미 FTA를 추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