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905 신봉승 지음 상권 352쪽, 하권 370쪽·각 1만1000원·선
일본이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키자 면암은 제자들을 불러 모아 나라의 위기를 알린다. “왜국과 같이 작은 나라가 노서아와 같은 큰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아시아를 평정하자는 속셈인데…, 그것이 바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조선을 집어삼키겠다는 흉계가 아니냐.” 같은 달 일본의 전쟁 수행에 대해 대한제국이 적극 협조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자 면암은 경운궁 앞에서 상소를 올린다. “온 나라의 땅덩이를 왜적들에게 송두리째 내주고자 하시지 않고서야 어찌 그와 같은 망국의 의정서가 맺어질 수 있습니까.”
팩션의 상상력은 이 광경을 지켜본 이토 히로부미가 경외감을 느끼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일본이라면 상급 무사에게 언성만 높여도 그 자리에서 살해되는데 임금에게 직언상소하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게 조선이 500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법도인가.’ 단호하고 강건한 인물로 그려지는 고종 황제, 확고한 신념의 충신으로 그려지는 충정공 민영환의 모습도 작품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면암 최익현 초상 동아일보DB
의병군은 정읍, 순창에 의병기를 꽂으며 승승장구했지만 곡성 인근에서 대규모 군대를 만났다. 일본군이 관군을 앞세우고 의병들을 맞은 것이다. 몇 차례 교전 후 고심하던 면암은 “이젠 총칼을 버려야겠다”고 말한다. 나라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댈 수는 없다는 고뇌에 찬 결심이었다.
의병은 자진 해산했고 면암과 그의 제자 13명은 일본군 헌병대에 투항했다. 면암은 일본 쓰시마 섬에 유배됐지만 그의 우국충정마저 꺾을 수는 없었다. 면암은 그곳에서 식음을 전폐하다 유배 5개월 만에 74세의 나이로 순절했다.
“아침에 일어나 북두를 바라보고 임금님 계신 곳에 절하고 나니, 흰머리 오랑캐의 옷자락에 분한 눈물 쏟아져 흐르는구나. 만 번을 죽는다 한들 어찌 부귀를 탐하리요….” 면암이 남긴 통절의 마지막 말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난세의 칼’ 등 역사소설을 써왔던 저자는 “1905년 당시 수많은 애국지사가 있었지만 논리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면암 선생만 한 분이 없었다. 쓰시마 섬에서도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아사(餓死)하신 것은 지식인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