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호기심 넘쳐나는 프린스턴硏
과학저술가 에드 레지스가 쓴 ‘누가 아인슈타인의 연구실을 차지했을까?’(2005년·지호)에 따르면 이 연구소는 백화점 사업으로 큰돈을 번 루이스 뱀버거와 그의 누이 캐럴라인 뱀버거 펄드가 주식을 판 후 대규모 기부활동의 첫걸음으로 지었다.
1930년 설립된 이 연구소는 순수이론과 기초과학의 산실로서 지금까지 14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20여 명의 필즈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과학자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연구소’로 오랫동안 자리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썼던 방을 쓰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고, 서로 자신이 천재라고 믿는 이 시대 걸출한 지성인들을 옆방 연구원처럼 쉽게 만날 수 있는 곳. 이곳에 가면 누구나 시들했던 학문열정이 다시금 용솟음치게 된다.
어떻게 이 연구소는 세계적인 과학자들을 한데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만들었을까. 뱀버거 남매와 플렉스너의 철학은 간단했다. 학자들에게 천국을 만들어주면 창의적인 연구 성과가 절로 나오리라 믿었다.
학자들이 바라는 천국은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공간’이 아니다. 연구소가 지적인 자극으로 넘쳐나고, 날마다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지고 치열하게 비판받는 곳. 다양한 시도를 격려하고, 의미 있는 실패가 용납되며, 누구도 평가하지 않는 곳. 승진이나 월급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호기심과 학문적 열정만으로 평생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다.
논문이 아니더라도 연구의 결과물이 다양한 형태로 세상에 기여하면 기꺼이 지원받을 수 있는 곳. 영감어린 토론으로 하루를 보내고, 내일의 출근이 기다려지는 곳. 어찌 이런 곳에서 지적으로 나태할 수 있겠는가!
연구실적 요구하는 한국의 현실은
우리나라 정부가 이런 연구소를 기획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국민의 세금으로 학자들의 천국이 웬 말인가. 평가가 사라진다면 과연 학자들이 연구를 열심히 할지 못미더워할 것이며, 이 제도를 악용해 연구비를 남용하고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는 학자들을 색출할 제도장치를 마련하는 데 여념이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학자들에게 연구비는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허락된 교부금(grant)이 아니라 목표 달성을 위한 용역비에 좀 더 가깝다. 과학이란 우주와 자연과 생명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지적 탐구가 아니라 국가가 발전하는 데 기여해야 할 성장동력으로만 간주되는 이상 기초과학연구소라도 원천기술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고 공무원들은 변명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평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 호기심으로 연구를 해온 역사가 훨씬 더 길며 인센티브가 없어도 좋은 연구 성과를 내고 싶어 안달이 날 만큼 학문적 욕심도 강하다. 그들을 격려하고 더욱 고무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일이 나태한 학자에게 채찍을 가할 궁리를 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다. 실제로 연구평가를 다음 연구비 수혜를 위한 고려사항으로 미룬다면 제도를 남용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을 선진국의 사례에서 배울 수 있다. 우리에겐 ‘20세기형 뛰어난 관리자’ 같은 과학자가 아니라 ‘21세기형 창조적 리더’ 같은 과학자가 필요하다. 학생이라는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해 기대목표를 만족하는 성과 중심형 관리자가 아니라 학생의 자발적 창의성을 끄집어내 함께 꿈을 실현하고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는 ‘인간가치를 깨달은 리더’가 필요하다.
‘학자들의 천국’은 그 혜택을 과학자들에게 한정하지 않고, 경쟁주의와 성장주의로 끊임없이 압박받는 삭막한 ‘우리 삶의 터전과 일상’도 천국으로 바꾸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정재승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