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은행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산타 트리니타 성당에 있는 사세티 채플의 프레스코화 오른쪽 부분. 왼쪽부터 안토니오 푸치, 로렌초 데 메디치, 사세티, 사세티의 아들 모습이 보인다.
○ 현대식 경영으로 유럽 금융시장 장악
메디치 가문의 실질적인 창업자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1397년 로마은행을 인수했을 때 메디치은행은 업계 3위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조반니 디 비치의 가업을 이어받았던 코시모는 메디치은행을 유럽을 대표하는 명문 은행으로 빠르게 키웠다. 코시모는 경영의 천재였다. 그는 다른 은행가들과 전혀 다른 방식의 은행 지배구조를 확립하고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다. 당시 피렌체의 거물 은행업자들은 본점과 지점의 지배구조를 주종관계로 설정하고 모든 지점장들은 본점에서 주는 급여를 받도록 했다. 코시모는 달랐다. 파트너십 제도를 이용해 지점장들이 월급을 받는 게 아니라 수익에 대한 지분을 나누는 지배구조를 채택한 것이다. 각 지점의 지점장들은 총자본금의 49% 이하의 금액을 투자하고, 코시모는 총자본금의 51% 이상을 보유해 지점의 소유권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소장된 한스 멤링의 ‘토마소 포르티나리와 그의 아내’(1470년경 작품). 포르티나리는 메디치은행의 브루게 지점을 몰락시킨 무능한 은행장이었다. DBR 자료 사진
○ 새로운 캐시 카우, 백반 독점 사업
은행업에 성공한 메디치 가문에 또 다른 행운이 찾아들었다. 당시 백반(白礬)으로 불리는 황산알루미늄(aluminium sulfate)은 직물을 염색하거나 가죽을 무두질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약품이었다. 양모를 탈색할 때 꼭 필요한 약품이었기 때문에 모직 산업이 발달했던 피렌체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비싸게 팔리던 물자였다. 문제는 이 백반이 지금의 터키 서해안 지역인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이즈미르 광산에서만 출토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는 십자군 운동의 열기가 채 가시기 전이었다. 교황청은 매년 백반 수입을 위해 거액의 돈이 이슬람 제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이때 마침 로마 인근의 톨파라는 곳에서 대규모 백반 광산이 발견됐다. 교황이었던 바오로 2세(1464∼1471년 재위)는 즉시 톨파 지역을 교황령으로 귀속시키고,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었던 메디치은행에 사업의 독점권을 부여했다. 당시 17세의 로렌초는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 피에로를 대신해서 교황 바오로 2세와 백반 전매 계약을 했다. 교황은 무슬림 상인에게 백반을 구매하는 유럽의 모든 사업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파문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놓아 메디치 가문에 힘을 실었다. 이 결과 메디치 가문은 모직 산업과 은행업에 이어 엄청난 규모의 독점적 이익이 보장된 백반 사업이라는 새로운 캐시 카우를 얻게 됐다. 하지만 이는 불행의 시작이었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로렌초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백반 사업까지 따내자 성공에 도취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츰 사업을 멀리했다. 로렌초는 복잡한 메디치 은행의 재무제표를 읽는 일을 무척 싫어했다. 참모들이 사업상 중요한 문제를 보고하면 “저는 그런 일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라고 대꾸하곤 했다. 로렌초의 자만 속에 전문경영인이었던 사세티도 긴장의 끈을 놓아 버렸다. 그는 집무실에 앉아서 각국의 지점으로부터 보고되는 재무제표와 보고서를 꼼꼼히 읽는 대신 보스인 로렌초와 함께 학자들이나 예술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경영자들이 캐시 카우의 달콤한 꿀에 취해 있는 동안 메디치은행의 리옹 지점과 브루게 지점에서는 악성 채무로 부실 경영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현장의 지점장들은 “군주에게 융자해 줄 때는 신중을 기하고, 되도록 돈을 빌려 주지 말라”고 경고했던 창업주 코시모의 유훈을 무시하고 막대한 금액을 리옹과 브루게의 정치가들에게 빌려줬다. 브루게의 무능한 지점장이었던 토마소 포르티나리는 사세티의 관리 감독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프랑스의 부르고뉴 공작에게 거액을 융자해 주었다가 큰 낭패를 보았다. 심지어 경영난에 봉착해 런던 지점을 폐쇄할 때도 포르티나리는 수익성이 높았던 원단사업을 챙겨 개인회사를 차리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1464년 유럽의 금값이 치솟자 메디치은행이 금화로 지불해야 하는 이자 부담이 껑충 뛰었다. 결국 메디치은행의 유럽 지점들은 차례로 문을 닫았다. 로렌초 사후 2년 만인 1494년에는 피렌체 본점까지 문을 닫았다.
○ 리더의 책임 망각이 파국 불러
사세티는 포르티나리 지점장의 모럴해저드를 몰랐다. 그런데도 로렌초는 그런 사세티를 ‘우리의 재무장관(nostro ministro)’이라 부르며 변함없이 신뢰했다. 사업이 기울고 있는데도 CEO 사세티는 보스인 로렌초에게 아부하기 바빴고, 로렌초는 전문경영인인 사세티만 믿고 관리감독이라는 리더의 기본적인 책임조차 망각했다.
로렌초는 왜 자신에게 맡겨진 리더의 임무를 소홀히 했을까? 그것은 그가 너무 빨리 캐시 카우가 안겨주는 안락감에 도취되면서 기업 경영과 관련한 전투력을 잃었고, 결국 이런 안일함이 부하 직원들의 모럴해저드를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들은 안전한 캐시 카우를 가졌을 때 더욱 신중하게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야 하고, 부하 직원들의 모럴해저드를 경계해야 한다. 캐시 카우를 가진 자가 모럴해저드를 조심해야 하는 이치는 누구든지 서 있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이치와 같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정리=박용 기자 par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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