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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연극女왕]9월 이서림…“연기할땐 나를 백지장에 그립니다”

입력 | 2010-09-30 03:00:00

욕설 한마디 못하는 내성적 성격…제 이미지에 갇혀 한때 슬럼프
자신을 모두 버리자 신들린 연기…연기하고 싶은 ‘50가지 이유’ 찾아




연극 ‘이오카스테’에서 신들이 정해놓은 운명에 짓밟히고 잊혀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테베의 왕비를 부활시켜 9월의 연극여왕에 선정된 이서림 씨.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떠올랐다. 창작극 ‘이오카스테’(이헌 작, 박정희 연출)의 타이틀 롤을 맡아 9월의 연극 여왕에 선정된 이서림 씨(34)다. ‘이오카스테’는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를 오이디푸스의 아내이자 어머니인 이오카스테 중심으로 재해석한 작품.

늘씬한 외모에 비음 섞인 목소리를 지닌 이 씨는 매력적인 외모로 남자의 마음을 흔드는 여성 역을 주로 소화해왔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영화로 더 유명한 ‘라쇼몽(羅生門)’에서 강도에게 겁탈당하는 부인 역, 프란츠 카프카 원작의 ‘심판’에서 주인공 요셉 K를 유혹하는 레니 역, 모파상의 ‘비곗덩어리’에서 뭇 사내들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창녀 역…. 그랬던 그가 그리스 고전비극의 위엄 넘치는 주인공으로 변신해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펼쳐냈다.

“연극계 새로운 여성 스타감을 찾아낸 느낌.”(구자흥 명동예술극장장), “정서와 신체적 표현의 균형감을 느낄 수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연극평론가 허순자), “이오카스테의 여성적 주체성을 몸의 현상학으로 제대로 체현했다.”(연극평론가 김형기)

연극계에선 그를 아직 신인 연기자로 아는 이가 많다. 하지만 이 씨는 데뷔 10년을 훌쩍 넘긴 배우다. ‘생존도시’ ‘웰컴 투 동막골’ ‘라이방’ 등 많은 작품에 출연했음에도 주목받지 못한 것은 자신의 이미지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슬럼프가 찾아왔어요. 실제의 저는 내성적이고 소극적인데 무대가 제게 원하는 배역은 자신의 욕망에 거침없는 이가 많았거든요. 미국 유학을 다녀와 연기 코치를 하는 사촌오빠(이동주 씨)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백지에 연기를 하고 싶은 이유 50가지를 써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하기 싫은 이유 50가지는 대겠는데, 하고 싶은 이유는 하나도 못 쓰겠더라고요.”

그때 그가 얻은 결론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나를 내 안에서 끄집어내자’는 것이었다. 비록 무대 밖에선 욕설 한마디 못하고 신호위반 한 번 못하는 사람이지만 무대 위에선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연기의 매력이라며. 그때 ‘이오카스테’의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얻으려면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기에 임했습니다. 오죽하면 박정희 선생님이 ‘야, 너 이 연극 다 말아먹을 셈이냐’라고 호통을 칠 정도였으니까요. 아무리 혼나도 백지장처럼 텅 비우고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을 놓치지 않았던 게 좋은 결과를 낳은 것 같아요.”

세상을 향해 한껏 날을 세운 눈빛과 짐승 같은 중저음의 발성이 그렇게 얻어졌다. 장장 12분에 걸친 독백을 신들린 듯이 해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미술학도 출신이었던 그는 ‘백지장’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대구에서 1남 4녀 중 막내딸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의 윤리적 강박관념과, 무대 위에선 그로부터 이탈하고 싶은 예술적 갈망이 그 위에 서성이고 있었다.

그것은 한때 미술학도를 꿈꿨던 여고생 이서림이 연극배우를 꿈꾸게 됐던 순간에 이미 잉태됐다. 난생 처음으로 연극 공연을 보러갔다가 ‘미성년자관람불가’란 딱지 앞에 프로그램만 사들고 돌아서야 했던 윤리적 강박관념. 반면 집에 돌아와 펴본 프로그램 속 여주인공 김지숙 씨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사진이 너무도 멋있어 그 모습을 3개월이나 공들여 목탄화로 옮겨 그린 예술적 갈망.

그 이율배반적 충돌은 결국 미대생이 된 이서림이 외국유학 준비 핑계를 대고 서울로 올라와 대학로를 서성이게 만든 동력이었다. 다섯 살 난 딸을 시부모에게 맡기고 두 달간 밤낮 없이 연기 연습에만 몰두하게 만든 요인도 그것 아닐까. 이제 연기를 하고 싶은 이유 50가지를 빼곡하게 채웠다는 그는 지금 자신의 백지장을 채워줄 제2의 이오카스테를 기다리고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