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의 옛 가옥은 대를 이어온 장인들이 ‘타피아’나 ‘바하레크’라고 부르는 이 지역만의 건축 방식 및 재료를 이용해 지은 문화유산이다.
사유재산 탓에 멋대로 보수
새집 짓겠다며 부수기도…
베네수엘라 북쪽의 항구도시 코로는 많은 것을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궁금증에 감질난 방문객이 답을 찾아가도록 한다. 안내팻말조차 찾기 어렵다. “여기서부터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옛 가옥이 시작됩니다.” 베네수엘라 문화유산청(IPC) 소속 안내원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도 별반 다르지 않은 시골 주택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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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의 건물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독특한 건축 문화를 창조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알록달록한 동화나라 속 마을 모형 같은 외관에 묻어나는 이국적 분위기. 스페인에서 건너온 유럽 및 이슬람 무데하르 양식에 네덜란드령인 중남미 섬에서 건너온 네덜란드 바로크 양식, 원주민의 건축 특징이 섞인 결과다. 더 큰 가치는 벽 속에 숨겨져 있다. 돌멩이와 말린 풀, 나무, 흙 등을 섞어서 쌓은 뒤 그 위에 다시 진흙을 이겨 바르는 이른바 ‘바하레크(bahareque)’와 ‘타피아(tapia)’ 방식이 바로 그것. 염소의 털까지 섞는 이 특별한 재료 혼합 방식은 코로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소수의 미장이들만 기술을 독점해 전승해온 무형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천장이 높다란 어느 주택 안으로 들어섰다. 중앙의 테라스를 ‘ㅁ’자형으로 둘러싼 복도를 따라 화초와 고풍스러운 가구들이 놓여 있었다. 복도의 타일, 천장 장식과 벽돌색 기와도 모두 건축 당시 그대로라고 했다. 테라스 앞 흔들의자에 앉아 TV를 보던 노부인이 비로소 돌아본다. “세계유산인 이 집에서 태어나 94년을 살았지요. 자랑스럽고 행복해요.” 알리시아 플로레스 라모레스 할머니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베네수엘라 코로 시내에 위치한 성 프란시스코 성당. 군더더기 없이 간소한 디자인은 유럽과 이슬람 무데하르, 원주민의 건축양식이 섞여든 코로만의 특징이다.
“소유권이 개인에게 있다 보니 관리와 보존에 어려움이 많아 정부가 가옥을 사들이려 합니다.” 유네스코 베네수엘라 국가위원회의 비올레타 안토네티 씨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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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의 여파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코로는 주거지 바로 옆에 광활한 사막이 펼쳐지는 건조 지역. 7년 연속 비 한 방울 오지 않은 적도 있던 이곳에 언젠가부터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2005년에는 대홍수로 주택 곳곳이 크게 훼손되면서 결국 유네스코 위험유산 리스트에 오르는 처지가 됐다. 헥터 토레스 IPC 청장은 “비가 익숙하지 않은 이곳은 배수 시스템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아 피해가 컸다”고 털어놨다.
집 안으로 들어서면 햇살이 내리쬐는 중앙의 널찍한 테라스가 손님을 맞는다. 94세의 알리시아 플로레스 라모레스 할머니가 흔들의자에 앉아 TV를 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정부는 뒤늦게 대응에 나선 상태. 2005년 이후 지금까지 3억 볼리바르(약 443억 원)를 투자해 복구 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IPC는 미래 보존계획을 수립해 대통령의 최종 사인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 지역에 사는 빈민에게는 교육과 생활비 지원 등에서 우선권을 준다. 집을 짓는 수작업을 무형문화로 규정하고 이를 유지해온 장인들을 특별 관리한다. 18명의 장인이 인근에 모여 살면서 보수 작업에 참여하는 동시에 후손에게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토레스 IPC 청장은 “배수 시스템을 만들어 폭우에 대비하는 작업은 거의 완료됐다”고 설명했다.
어느새 하늘이 깜깜하다. 골목 끝의 한 허름한 간이식당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때서야 아레파(옥수수 반죽에 고기나 생선을 넣고 튀겨낸 베네수엘라 전통 음식)를 한 입씩 베어 먹으며 저녁 식사를 때우는 IPC와 유네스코 직원들. 하루 종일 코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도와준 이들의 발품은 유산복구 노력의 한 단면일 터이다. “코로를 반드시 유네스코 위험유산 리스트에서 빼내겠다”는 베네수엘라의 목표 달성이 예상보다 빨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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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종합대 곳곳에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찾아볼 수 있다. 대학건물 연결 통로에 설치된 예술작품 앞에서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토론을 벌이고 있다.
이 대학은 1970년대 베네수엘라 출신의 건축가인 카를로스 빌라누에바가 자신의 건축이념을 담아 디자인한 ‘작품’이다. 그는 당시 이름을 날리던 전 세계 28명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함께 10여 년간 대학 전체에 예술적 숨결을 불어넣는 대담한 작업을 추진했다. 이런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넓은 공간에 건물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탓일까. 첫인상은 평범했다. 하지만 대학 구석구석을 다닐수록 세세한 디자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강당 천장을 장식한 알렉산더 칼더의 ‘떠다니는 구름’은 학생들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이 대학만의 특징. 도서관 로비의 벽 한쪽을 전부 메운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약대와 의대 앞에 놓인 조각상, 각 대학 건물의 벽을 장식한 형이상학적 무늬의 타일과 그림 앞에서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책을 읽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2개밖에 없는 베네수엘라 내 유네스코 문화유산 중 하나”라는 대학 측의 자랑에도 불구하고 건물 곳곳에는 갈라진 틈과 벗겨진 페인트, 깨진 벽돌이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빗물이 새는 곳도 있었다. 이 대학의 마리아 데브게니아 바치 홍보국장은 “복구 보존에 생각보다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며 “(국가재정의 주요 수입원인) 유가가 하락해 대학 예산에도 직격탄을 맞았다”고 설명했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21세기 사회주의’에 비판적인 대학생들의 반발이 정부 예산을 줄이는 결과를 낳았다는 얘기도 있다.
글·사진 코로·카라카스=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