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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8·15]유종호 문학평론가·前연세대 특임교수

입력 | 2010-08-10 03:00:00

日항복했으니 솔뿌리는 이제 안캐도 돼…
그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요 해방이었다




 

그날이 오던 그해, 1945년 4월에 나는 충북 충주남산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전반부는 초등학교 시절 중 최악의 시기였다. 지옥의 계절이었다. 늦봄부터 하루돌이로 솔뿌리를 캐러 산행을 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연료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송근유(松根油)를 군용 대체연료로 책정하고 한반도 전역에서 솔가지와 솔뿌리 채취를 강요했다. 전쟁 초인 1942년엔 여름방학 숙제로 송진 달린 솔가지를 일정량 내도록 했다. 그러나 전쟁 말기엔 수업을 전폐하고 아침부터 산에 가서 솔뿌리를 캐게 한 것이다.

 

산야가 황폐해서 쉽게 솔뿌리를 구할 수 없었고 점점 으슥한 산골로 갈 수밖에 없었다. 톱 괭이 혹은 도끼를 준비하고 채취한 솔뿌리를 운반하기 위해 새끼줄로 멜빵을 해서 가마니때기를 지고 갔다. 점심때까지 채취하는데 채취량을 검사해서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도시락을 못 먹게 했다. 점심 먹고 휴식을 취한 후 군가를 제창하고 하산하는데 이때부터가 고역이다. 열 살에서 열서너 살짜리들에겐 우선 가마니때기 무게도 소홀치 않은데 거기 솔뿌리가 끼어들었다. 새끼줄이 어깨에 배기는 고통도 만만치 않았다. 그걸 참으며 십오 리 길을 돌아갔다.

학교에서 일본어로 ‘쇼콩(松根)호리’라 했고 집에서는 ‘송탄(松炭)캐기’라 했던 이 짓거리는 언뜻 소풍같이 들릴지 모른다. 당시 우리가 영양실조 상태에다가 몹시 배가 고팠다는 사실, 또 신발이라야 게다라는 나무 샌들을 걸치고 산길을 오르내렸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겪어보지 않고는 그 고통을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전국의 초등학교에서 이런 소년강제노동이 일률적으로 시행된 것은 아니다. 학교마다 일정량이 배정돼 있었고 마침 상급생이어서 하루돌이로 노역에 동원된 것이다. 선우휘의 자전적 소설 ‘기빨 없는 기수’에도 압록강가의 오지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솔가지 채취를 갔다가 돌아오니 광복 소식으로 동네가 야단법석이었다는 대목이 있다. 뒷날 서울 거주 동년배가 송탄캐기를 전혀 모르고 있어 놀란 적이 있다. 그제나 이제나 시골살이는 손해 보는 놀음이다. 일본 본토의 경우 동갑인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의 작품 어디에도 소년강제노동 얘기는 보이지 않는다.

방공호 파기도 고역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여름방학에 들어갔을 8월 어느 날 조회시간에 교장선생이 긴 훈화를 했다. 미국이 파괴력이 굉장히 큰 신형 폭탄으로 히로시마를 폭격해 많은 희생자가 났다는 점, 군인 아닌 민간인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일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고 일본은 무도한 적과 끝까지 싸워 꼭 이기고 말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북한에 소련군이 상륙하자 전선이 다가온다는 긴박감이 퍼졌다. B29가 서울 상공에 나타났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우리 땅이 싸움터가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은 터였다. 학교 곳곳에 소규모 방공호가 파여 있었으나 새로운 사태에 대비한다며 측백나무 울타리 밖으로 새 방공호를 파기 시작했다. 상급생이 총동원되었고 들어서면 가슴께까지 올라오도록 깊이 파야 한다고 며칠을 계속 삽질과 곡괭이질을 시켰다. 겨드랑이에 망울이 생겨 벌겋게 부어오르고 아팠다.

어느 오후 이모 댁에 들렀더니 집안으로 들어서며 이종 누이가 일본이 항복했다며 거리에서 수군수군한다는 소리를 전했다. 그런 소리 함부로 하면 되느냐는 이모의 말에 라디오 뉴스에 나왔다더라고 누이는 덧붙였다. 연합함대(聯合艦隊)가 건재한데 항복할 리가 없다고 이종형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했다. 빈번한 근로동원에 넌더리를 내고 청주중 4학년 때 학교를 무단 중퇴한 이종형은 군사문화엔 질색이었으니 시국동향에 남다른 안목이 있을 리 없었다. 무적함대라고 선전하던 일본의 그 연합함대가 괴멸했다는 것을 다들 그랬듯이 그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곧이어 일본이 항복했음을 일왕이 육성으로 방송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종형은 그렇다면 전쟁이 끝났다는 얘기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그때 제일 먼저 내게 떠오른 생각은 이제 지긋지긋한 솔뿌리 캐기나 방공호 파기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이요, 해방이었다.

이튿날인 16일엔 거리로 사람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좋다! 좋아!” 하면서 춤을 추며 거리를 행진했다. 공습 때 표적이 된다며 못 입게 했던 흰 바지저고리 차림의 사람이 대종을 이루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17일 학교로 간 우리는 전에도 더러 그랬듯이 대오를 지어 시가행진에 나섰다. 교사들은 모두 손에 종이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사괘가 빠진 청색과 적색의 원형만 있는 태극기였다. 담임교사가 반소매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그것이 신기해서 또렷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국민복이나 노타이셔츠만 입던 시절이니 넥타이 차림은 신선하기 짝이 없었다.

담임의 선창에 따라 우리는 간헐적으로 만세를 불렀다. 만세 앞에 어떤 말을 붙였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일본말로 만세는 수없이 불러봤지만 우리말로 만세를 부르니 기분이 영 달랐고 낯선 진정성 같은 게 느껴졌다. 거리에선 주민도 행진에 나서고 있었다. 일단의 성인 남성들이 손에 조그만 쪽지를 들고 그것을 보며 올드 랭 사인의 곡조로 노래를 불렀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애국가였다. 그들은 간헐적으로 행진을 멈추고 만세를 불렀다. 하루 전만 하더라도 그저 “좋다! 좋아!” 했는데 만세로 진화한 것이다.

그 무렵 조회 때 아마기(天城) 교장이 자기 본래의 성이 조씨이니 앞으로 조 교장으로 불러달라는 얘기를 했다. 이어 광복이니 독립이니 하는 생소한 말을 써가며 얼마 전과는 영 다른 얘기를 들려주었다. 커다란 충격이었고 다시 한 번 세상이 변했다는 실감을 안겨줬다. 읍내에서 가장 작은 초등학교인 남산학교 교장과 전국 13도에서 가장 작은 공립중학교인 충주중의 교장이 반도인(半島人)이란 사실에 은근히 긍지를 느낀 게 당시 우리 또래의 의식 수준이었다.

교실에서는 담임 니시하라(西原) 선생이 칠판에 커다랗게 ‘李鍾煥’이라고 한자로 판서하더니 ‘이종환’이라고 읽는다며 자기 이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집에서 부르는 성과 이름을 대라 해서 우리는 출석부 번호 순서대로 자기 성명을 댔다. 통성명을 통한 이름 찾기가 그날 이후 우리가 치른 첫 의식이었다.

읍내에는 갖가지 소문이 나돌았다. 청년들이 일본인 주택을 수색해서 일본도를 위시한 무기를 압수했다, 일본인 성인 남성을 충주극장에 수용했다, 그러다가 자중하겠다는 서약을 받고 모두 풀어주었다는 등속의 소문이었다. 중학생이 신사의 도리이(鳥居)를 부숴 버렸다는 소문이 있어 가보니 정말 흰 돌기둥이 풀숲 한 모퉁이에 흉하게 쓰러져 있었다.

당시 충주의 동명은 모두 일본식으로 되어 있었다. 중심부에 있는 가장 큰 거리인 본정통(本町通)에는 하라구치(原口)상점이란 일본인 소유의 상점이 있었다. 그 상점 한 모퉁이에 건국준비위원회란 붓글씨 종이가 유리 안쪽에 나붙고 몇 사람이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눈에 띄었다. 유리창에는 새 소식을 알리는 등사된 종이가 붙어 있기도 했다.

어느 날 밤 일본 군인을 태운 트럭이 충주로 오고 있다는 확성기 소리가 들렸다. 그 이튿날 읍내의 주요 건물이나 동회 앞에 ‘헌병’이란 완장을 두른 군인들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우리나라 TV 연속극에 곧잘 나오던 일본 헌병과 똑같은 모습인데 내가 일본 헌병의 실물을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충주에서 일본인 성인 남성을 수용했다는 소식을 듣고 보호 차원에서 청주에서 왔다는 소문이었는데 별일은 없었고 이들도 곧 돌아가 눈에 띄지 않았다. 지방에 따라 일본인에게 해코지를 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우리 고장에선 그런 일이 없었다. 며칠 뒤 거리에서 일본인을 더러 볼 수 있었다.

하루는 비행기 폭음이 요란해 나가 보니 비행기가 충주 상공을 선회했다.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날개에 그려진 게 미 공군 표지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윽고 비행기에서 무엇인가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연거푸 쏟아져 나왔는데 흩어지며 천천히 내려오는 광경은 처음 보는 구경거리였다. 한참을 달려가 주워 보니 삐라(전단)였다. 빤질빤질하고 제법 두툼한 종이에는 한글과 일본 글씨가 적혀 있었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38선 이남에선 미군정이 실시된다는 것 등 정치 변화와 주민 준수사항이 적힌 홍보 전단이었다.

그날 이후 거리에서는 엿장수와 담배장수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전쟁 말기에는 과자나 캐러멜 등속은 자취를 감추고 엿도 사라졌다. 단속이 사라지자 엿도가가 성황을 이루고 너도나도 엿목판에 엿을 놓고 팔았다. 행상도 많았다. 담배를 썰어서 적당히 말아 만든 사제담배를 파는 행상인도 늘어났다.

미군이 언제 진주했는지 날짜는 모르겠다. 충주중에도 미군이 들어 강당과 기숙사를 사용했는데 지프와 카키색 군복, 챙 없는 군모와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 미군 지프가 거리를 달리는 모습은 아주 익숙한 정경이 됐다. 거리를 걸어가는 미군을 따라가며 껌이나 초콜릿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8월 말인지 9월 초인지 분명치 않지만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했다. 충주중 사택촌을 지날 때였다. 사택촌에는 일본식 단층집 예닐곱 채가 정방형으로 서 있고 한가운데는 넓은 채마밭이 있었다. 채마밭 복판에 중학생들이 목총을 들고 고함을 지르며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중년의 일본인 남자가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근로동원 나가서 고약하게 굴지 않았느냐” “걸핏하면 우리 조선학생을 얕보고 욕설하지 않았느냐”고 학생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목총 개머리판으로 땅바닥을 치며 소리쳤다. 완전한 반말이었다. 오가는 내용으로 보아 교련교관을 몰아세우고 있었다. 상하관계의 완전한 역전에 나는 기묘한 흥분과 쾌감과 공포감을 느꼈다.

 

“고도고도쿠 와루 고자이마시다(모조리 잘못했습니다).” 교관은 풀죽은 소리로 되풀이했다. 이윽고 기모노 차림의 일본 여성이 나타나 “저와 저희 어린 것들을 보아서라도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울먹이며 말했다. 학생들은 “깊이 반성하고 행동을 조심하라”고 일갈한 뒤 자리를 떴다. 내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어서 65년이 지난 오늘에도 “고도고도쿠 와루 고자이마시다”란 일본말이 귀에 생생하다.

학교가 다시 개학한 것은 9월 하순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때쯤엔 인사이동으로 교사 전원이 바뀌었다. 대전감옥에서 출소했다는 청년이 우리 담임이 되었다. 그리고 미군정청에서 펴낸 ‘한글 첫걸음’이란, 얄팍하지만 지질 좋은 교재를 분배받고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한자, 일본 가나에 이어 한글은 내게 세 번째 글자였다. 1941년 입학하던 해에 총독부에서 조선어 시간을 전폐했기 때문이다. 그 전해까지는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조선어 시간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