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인’으로 돌아간 허정무 前감독
허정무 전 축구대표팀 감독이 13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 자택에서 밝은 표정으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월드컵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이룬 그는 “모처럼 여유 있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좀 쉰 뒤 기회가 되면 K리그 팀을 맡고 싶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이젠 차기 감독에게 월드컵 8강 이상을 요구해야 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의 대업을 이룬 허정무 전 축구대표팀 감독(57)은 ‘야인’으로 돌아갔으면서도 한국 축구의 미래를 걱정했다. 지난달 29일 귀국한 뒤 2일 “대표팀 사령탑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한 그는 축구 원로와 친지들을 찾아 인사하고 지인들과 골프를 하면서 모처럼 여유 있는 생활을 즐겼다. 만나는 사람마다 “정말 아쉽다. 8강도 갈 수 있었는데”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단다. 13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 자택에서 허 감독을 만났다.》
○ 외국인 감독 선호 사대주의적인 분위기 많아
“제가 16강을 했다고 후임 감독 후보들이 부담스러워 안 하려 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잘못됐습니다. 대한축구협회나 팬들도 이젠 8강 이상을 요청해야 할 때가 됐어요. 한국 축구는 이제 국제무대에서 언제든 16강을 갈 실력이 됩니다. 그렇다면 목표는 더 높게 잡아야 합니다.”
그는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의 주역 거스 히딩크 감독을 제외하면 한국 축구에 크게 보탬이 된 외국인 감독은 없다고 평가했다. 움베르투 코엘류, 요하네스 본프레러,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등은 성적에 목매다 보니 대표팀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다고 말했다.
○ “꿈나무에게는 재미를 주는 축구를 하자”
“월드컵을 치르면서 우리 선수들이 어렸을 때부터 기본기를 철저하게 다졌으면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 축구가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은 2%가 부족해요. 그게 바로 기술입니다. 기술은 어렸을 때 완성됩니다. 꿈나무에게 성적을 강요하는 분위기를 바꿔 축구를 즐기게 해야 합니다.”
허 감독은 골반 유연성을 강조했다.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가 전력으로 드리블하면서 90도로 한두 차례 완전히 꺾고 다시 자연스럽게 드리블할 수 있는 게 골반 유연성 덕분이란다. “골반 유연성은 어릴 때 완성됩니다. 재밌게 즐기게 하면서 기술을 가르치면 골반 유연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적에 얽매여 강훈련을 시키니 골반이 딱딱하게 굳고 말죠. 한국 선수들이 창조적인 플레이를 하지 못하는 원인입니다.”
“2008년 10월 주장이던 김남일을 대표팀에서 제외하면서 새 주장을 뽑아야 했죠. 내심 박지성을 지목하고 코치들에게 물어봤어요. 코치들은 이영표를 거론했죠. 하지만 나는 박지성이 돼야 팀이 잘 돌아갈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허 감독은 당시 이운재 이영표 염기훈 이정수 박지성 등 고참 선수를 모아놓고 “새 주장은 이영표가 하면 어떻겠느냐”고 떠봤단다. 그러자 이영표가 펄쩍 뛰며 “전 안 돼요. 지성이 시키세요”라고 했다. 다른 선수들도 모두 “그래요. 박지성이 적임자입니다”라고 거들어 자연스럽게 박지성에게 주장 완장을 채울 수 있었다.
허 감독은 “박지성은 책임감이 강하다. 최초의 프리미어리거임에도 언제나 솔선수범해서 후배들이 잘 따른다. 이운재 등 고참들도 박지성을 신뢰한다. 주장으로 적임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박지성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김남일과 안정환 등 2002년 월드컵 멤버들도 뽑았다. 고참들이 뒤에서 받쳐주니 박지성도 소신 있게 행동했다”고 전했다. 그리고 중요한 경기 땐 선발 라인업도 물어보며 힘을 실어줬다. 허 감독은 “16강의 원동력을 굳이 찾자면 이렇게 선수들과 소통한 것이다”고 말했다.
○ “골프 바둑 당구는 스트레스 해소에 최고”
허 감독은 바둑 아마 4단이다. 당구는 300점. 그는 “대학 이후 당구를 안 치다 최근 친구들을 만나 가끔 치니 스트레스가 해소됐다. 당구와 바둑, 골프는 팀을 이끌면서 내가 유일하게 스트레스를 푸는 창구였다”고 말했다. 허 감독은 바둑에서 축구를 배운다. ‘상대가 강한 곳으로 침투하지 마라’ ‘판 전체를 봐라’ 등은 축구에서도 꼭 지켜야 할 법칙이란다.
최근 이용규 교수의 ‘더 내려놓음’이란 책을 읽은 허 감독은 마이클 프란지스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라’란 책을 읽기 시작했다. 고집불통 ‘진돗개’의 이미지를 벗고 소통을 통한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변신해 사상 첫 원정 16강을 이룬 배경에는 독서도 큰 몫을 했다. 허 감독은 “일단 푹 쉰 뒤 기회가 되면 K리그 팀을 맡아 우승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