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화가들은 우리 땅을 어떻게 그렸나/이태호 지음/522쪽·3만 원 생각의나무明이 망하자 조선 ‘진경산수’는 흥했다
단원 김홍도가 1788년에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그 연못을 그린 ‘구룡연도’(왼쪽). 풍경에서 받은 느낌과 감정을 중시한 겸재 정선과 달리 단원은 카메라로 찍은 듯한 사실적 화법으로 대상을 그렸다. 오른쪽은 구룡폭포의 실경. 사진 제공 생각의나무
15∼17세기 조선 전기 산수화는 중국 송·명대 화풍에 빠져 있었다. 당시 산수화풍을 대표하는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나오는 산언덕들은 중국 화베이(華北) 지방의 험준한 지세를 연상시킨다. 저자는 “조선 전기에는 북송의 시인 소동파를 따라 마포 서쪽의 한강을 ‘서호(西湖)’라 부르고 그 동쪽은 ‘동호(東湖)’라 부를 정도로 강남열풍에 빠져 있었다”며 “문인과 화가들이 조선 땅을 그린 시점을 기준으로 조선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겸재 정선(1676∼1759)은 진경산수화의 대가이지만 진경의 화풍은 그 이전에 싹트고 있었다. 선조의 부마이자 시서(詩書)에 뛰어났던 문인 동회거사 신익성(1588∼1644)은 일찍이 진산수(眞山水) 화론을 펼쳤다.
독창적 화풍 완성 정선-김홍도 등
그림과 함께 설명
17세기 후반 현종·숙종 때에는 진경산수화의 전통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당대 화가 조세걸(1635∼?)은 1682년 성리학자 김수증의 은거지를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로 남겼다. 주희의 무이구곡이나 소동파의 서호 등을 선망하며 그림의 소재로 삼았던 이들이 자기 땅에서 학문과 예술을 구현하려 한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조선의 문인이 조선의 땅으로 시선을 돌린 것은 명나라가 청나라로 바뀐 중국의 상황과 무관치 않다. 숭명(崇明) 의식이 강했던 조선 문인들은 충격을 받았고 소중화(小中華), 조선중화(朝鮮中華)를 주창했다. 중국에 시선을 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념을 표방하며 조선 후기에 집권했던 세력이 서인(西人) 노론(老論)이었고 그들과 절친했던 숙종·영조 시절의 진경작가가 겸재였다. 그는 생활터전이었던 인왕산 백악 남산을 비롯해 여행지로 삼았던 금강산 등을 예술 대상으로 해 조선의 회화양식을 창출했다. 풍경을 부감해 재구성하는 구도뿐만 아니라 붓끝을 반복해서 찍는 미점준(米點준), 한손에 붓을 두 자루 쥐고 그리는 양필법(兩筆法) 등을 창안했다.
겸재는 대상을 과장하고 재구성하는 변형화법으로 독창적인 진경산수화풍을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사실묘사보다 현장에서 느꼈을 법한 감명을 표현했고 행태를 그리면서도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저자는 “1751년 작품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외에는 겸재의 진경이 실제 풍광과 다른 경우가 많다”며 “이는 조선의 풍광을 그리면서도 선경(仙境)의 의미가 내포된 성리학적 이상을 그리려 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1998년 금강산을 직접 다녀온 저자는 겸재의 진경작품이 왜 실경과 닮지 않았나에 대한 해명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실경과 닮지 않은 변형화법은 ‘체험하는 지각’인 기억에 의존해 그리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풍경이 내 속에서 생각한다’는 말을 남긴 프랑스 인상파 화가 폴 세잔과 비슷하게 정선은 자연의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그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정선과 김홍도뿐만 아니라 겸재 일파의 선도작가 진재 김윤겸(1711∼1775), 개성적인 사생화가였던 지우재 정수영(1743∼1831) 등을 통해 조선의 산수화풍을 훑어준다. 지금까지 썼던 논문을 기반으로 책을 엮어 구성이 거친 것이 아쉽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