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는 드릴 饋(궤)와 같다. 女樂은 음악과 무용을 하는 여성을 말한다. 공자는 定公 때 中都(중도)의 宰(재)로부터 司空(사공)이 되고 다시 大司寇(대사구)가 되었으며 제나라와 夾谷(협곡)에서 회합을 할 때 나라의 위신을 세웠다. 또 악독한 대부 少正卯(소정묘)를 죽였으며 마침내 재상의 직무를 겸하였다. 이때 제나라는 미녀 80명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康樂(강악)에 맞춰 춤을 익히게 하고는 좋은 말 120필과 함께 보내어 曲阜(곡부)의 성 밖에 정렬시켰다. ‘사기’ ‘孔子世家(공자세가)’에 나온다.
계환자와 정공이 정치를 소홀히 하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려고 결심하되 당장 떠나게 되면 군주의 현명하지 못함을 온 천하에 공표하는 셈이 되므로 떠날 기회를 엿보았다. 얼마 뒤 郊祭(교제)가 거행된 후 정공이 대부들에게 희생의 고기를 나누어주어 오던 慣例(관례)를 지키지 않자 공자는 재상의 일을 대행하는 자신의 책임이라 하면서 마침내 노나라를 떠났다. 이 역시 ‘공자세가’에 나온다. 出處進退(출처진퇴)의 자세를 현대의 정치가는 배워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