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학기림회 “외부 도움없이 십시일반 회비로 운영”
우리문학기림회 발족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일 서울 성북동 수연산방(소설가 이태준이 살았던 집)에 모인 회원들. 왼쪽부터 채찬석 소사중학교장, 이명재 중앙대 명예교수, 이응수 세종대 교수, 이영구 전 중앙대 교수, 이명숙 전 우리문학기림회장, 소설가 김지수 씨. 전영한 기자
1990년 이영구교수 등 4명
김우진碑건립으로 시작
현재 회원수 16명으로 늘어
2일 오후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카페 ‘수연산방’. 소설가 상허(尙虛) 이태준이 1930년대 기거하면서 창작을 했던 이곳에 문학 애호가인 퇴직 교수와 소설가, 교사 등 6명이 모였다. 딱 20년 전인 1990년 5월 2일 이영구 전 중앙대 교수(79·일문학)와 이명재 중앙대 명예교수(72·국문학), 이명숙 전 숙명여대 강사(77·독문학), 김효자 전 경기대 교수(78·일문학) 등 4명이 처음 만든 ‘우리문학기림회’ 20주년을 기념하는 조촐한 회동이었다.
우리문학기림회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의미 있는 작품은 남겼지만 변변한 문학비조차 없는 문인들을 찾아내 비를 세워 기리는 모임. 이들은 20년 동안 어떤 외부 단체의 지원도 받지 않고 십시일반으로 회비를 걷어 조용히 문인들을 기려왔다. 이들은 이날 1997년 이곳 수연산방에 세운 이태준 문학비를 쓰다듬으며 20년을 회고했다.
모임은 순수성을 잃지 않기 위해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 대신 이영구 교수가 사재를 털고 회원들이 조금씩 보탰다. 외부에 떠들썩하게 알려 회원을 늘리지도 않았다.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만 받아들였고 지금은 16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발족 3개월째인 1990년 8월 전남 목포시와 영광군에 극작가 김우진, 수필가 김진섭 등 문인 6명의 기념비를 세웠고 이후 2008년 문학평론가 백철까지 총 20명의 문학비를 건립했다. 2001년엔 중국 룽징(龍井) 시를 찾아 항일시인 심연수의 문학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명재 교수는 “우리와 동시대를 살면서 작품을 남긴 그들의 자취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안타까웠다”며 “문화민족의 자긍심이 문학비를 통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동참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혼불’의 작가 최명희와 일본에서도 그 문학성을 인정받은 수필가 김소운의 문학비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 가장 기뻤다”고 회고했다.
2001년 당시 모임을 이끌었던 이명숙 전 회장은 심연수 문학비 건립과 현지에서의 문학심포지엄을 준비하다 과로로 좌반신이 마비되는 병을 얻었고 이후 회복되기도 했다. 그는 “경비를 아끼느라 현지 가이드 없이 모든 것을 준비하는 바람에 몸에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며 “회원들 모두가 그렇게 열심이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 해금된 월북 문인들이 문학비를 세울 때, “괜한 논란에 휘말리기 싫다. 기념비를 세우지 말아달라”는 문인 후손도 있었다. 이응수 우리문학기림회장(세종대 교수)은 “2000년대 이후로는 문인을 발굴하기도 힘들고 연고자나 연고지에 연락을 하면 직접 세우겠다는 분이 많아 우리의 소임은 점점 줄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문학기림회는 2000년대 들어 문학비 건립과 심포지엄·학술대회 개최를 병행하고 있다. 2007년 회원으로 가입해 총무를 맡고 있는 채찬석 경기 부천시 소사중학교장은 “문학비 건립의 기회가 줄고 있어 앞으로는 학술대회와 심포지엄을 늘려 문인들을 기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올해 7월에는 일본에 기악무를 전한 백제인 미마지의 기념비를 일본에 가서 세울 계획이다.
이영구 교수는 “문학비에 새겨진 문인의 행적을 보고 누군가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한번쯤 찾아보고 기억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며 “여든을 바라보는 1세대 회원들을 대신할 젊은 사람들의 참여가 계속됐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