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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 묘비에 드디어 ‘열사’ 칭호 삽입

입력 | 2010-04-18 13:51:38


4·19 혁명의 기폭제가 된 김주열(1943~1960)열사의 묘비에는 그동안 '열사(烈士)'라는 글자가 없었다. 혁명 이후 군사정권 집권으로 열사라는 표현을 쓰기가 어려웠고 관심과 예산 부족 등으로 묘비석에는 '金朱烈之墓(김주열의 묘)'라는 한자만 새겨진 채 50년이 흘러왔다.

열사는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자신의 뜻을 죽음으로서 펼친 이를 이르는 칭호. 이승만 정권의 부정에 맞서 1960년 3·15의거 당시 산화(散華)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마산상고 학생 김주열(당시 17세)의 묘비에 '열사'라는 칭호가 써 있지 않아 그 동안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김 열사 서거와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19일 전북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묘역에서 누나 김경자씨를 비롯한 유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남원시, 남원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 주관 기념식과 함께 새 묘비석 제막식이 열린다.

50년 동안 빠져 있던 '열사'라는 표현과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내용이 추가된 '烈士 金朱烈之墓' 묘비석이 세워지는 것.

남원시와 추모사업회는 3월부터 1억원을 들여 지름 2m의 봉분을 5m로 넓히는 등묘역을 정비하고 새 묘비석을 준비했다. 봉분 옆 기존 자리에 놓이는 새 묘비석은 한자 '烈士'가 추가돼 길이가 180cm로 30cm 늘었다.

묘비석은 지금까지 세 차례 교체됐다. 1960년 장례 후 만든 목비와 1964년 유진오 박사가 쓴 비석, 1994년 만든 비석 등에는 '열사'라는 글자가 빠져 있었다.

새 묘비석 정면에는 '烈士 金朱烈之墓'라는 글자가 새겨졌고 나머지 3면에는 열사 이력과 3·15의거 상황, 훼손된 열사 시신 수습에 이은 4·19혁명 등이 900자 정도로 기술됐다. 특히 "1960년 4월11월 눈 부위에 최루탄이 박힌 열사의 시신 인양은 '열사 부활'이었고, 그가 없었다면 4·19혁명이 없었을 것이다"는 등의 내용이 추가됐다.

추모사업회 한병옥(68) 제전위원은 "이전 묘비 내용은 3·15의거가 4·19를 촉발했다는 점에 중점을 두었다"면서 "새 묘비에는 열사 시신 인양이 4·19의 직접 도화선이 됐고 그것이 5·18과 6·10항쟁, 노동운동 등을 거쳐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대 민주화운동의 뿌리가 모두 4.19에 귀착되는데 김주열 열사가 바로 그 혁명을 촉발한 주인공이며 핵심적, 상징적 인물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 덧붙였다.

인터넷 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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